무능과 정치적 주체화

 

 

권명아

 

 

 

 

   무능이 지배하는 시대다. 무능이란 능력이 없는 상태니, 무능이 ‘지배하다’의 주어 역할을 할 수는 없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비판과 한탄이 넘쳐날 만한 상황이 분명하지만, 이를 넘어선 무능의 ‘정치화’가 더욱 필요하다.

 

 

   메르스 사태에서도 새삼 확인되듯이 국가는 국민의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유지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무능은 단지 대통령이라는 상징적 1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좀 더 능력 있는 지배자가 대통령이 된다면 이 말도 안 되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미디어에서는 메르스 사태에 대한 정계의 대응을 마치 대선 전초전처럼 보도하기도 한다.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의 갈등도 대선 예측으로 귀결된다. 이런 상황은 능력 있는 지도자에 대한 국민의 높은 관심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달리 보자면 이런 문법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넘쳐나는 ‘무능론’은 ‘지도자 대망론’의 변주에 그칠 수 있다. 이런 논리에서 지배의 능력은 지배자의 것이거나, 국가기구의 몫일 뿐, 누구나의 것이 될 수 없다. 결국, 지도자만 바뀔 뿐 삶은 변하지 못한다.

 

 

   재난 상황에서 무능한 국가(기구)를 대신해서 무수한 사람이 자신과 공동체의 안전과 행복을 지키기 위해 나서고 있다. 이는 국가 부재의 한탄스러운 상황이기도 하지만, 무능의 빈자리에서 새로운 주체가 만들어지는 역동적 상황이기도 하다. 이렇게 형성된 주체는 더는 지배능력을 ‘국가’에 내맡긴 다스림의 대상이 아니다. 지배능력은 이제 국가의 몫이 아닌, 다스려지던 사람들의 몫으로 되돌려진다. 이렇게 되돌려지는 과정이야말로 무능이 ‘정치화’되는 사건이다. 그리고 이런 사건들은 메르스 사태 이전에도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한 예로, 진주의료원 폐업에 반대하며 공공 의료 체계와 지역의 의료 주권을 요구하던 경남도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메르스 사태를 통해, 음압병실의 필요성을 포함하여 진주의료원 폐업 사태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를 많은 사람이 이제야, 겨우 실감하고 있다.

 

 

   “정치가 싸움이라는 걸 이제 알았다.”(심은숙) “정치가 생활이다. 이전에는 의원이 갑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우리가 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박소연) ‘양산 무상급식 지키기 집중행동 밴드’ 모임 좌담 자료는 이런 정치화의 경험을 잘 담고 있다.(오마이뉴스, 6월8일) 회원들의 이야기는 “이전에는”, “처음에는”으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누구도 자신들이 하는 일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꼬리를 흔들어 몸통을 움직이는”(허문화) 일을 했다고 해석한다.

 

 

   프랑스 철학자 장뤼크 낭시는 사회를 머리와 배, 꼬리로 구성된 유기체로 상상하는 방식이 중심과 주변의 위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린다고 논했다. 그래서 이 위계를 벗어나려면 바로 그 ‘수미일관한 몸’이라는 관성적 담론을 넘어서야 한다. “꼬리를 흔들어 몸통을 움직인다”는 양산 학부모들의 발상은 그런 점에서 이미 몸통과 꼬리의 관계를 깨뜨렸다. 이제 지배는 몸통이 아닌 꼬리의 몫이 된다. 그들이 “이전에는”, “처음에는” 상상도 못 했던 정치적 주체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무능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능한 머리를 대체할 능력 있는 머리가 아니다. “꼬리로 몸통을 움직이는” 방식이야말로 무능이 지배하는 시대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무능의 정치화 방법이다. 이는 머리와 꼬리라는 분할로 이루어진 사회상을 깨뜨리고, 새로운 사회상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꼬리로 몸통을 움직이자. 무능을, 더욱 정치화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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