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이 맞서다

 

 

권명아

 

 

 

 

   결국, 그것을 봤다고 친구가 말한다. 1년이 지나서야 겨우 끝까지 볼 용기가 났다고 한다. 나는 사실 아직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아이들이 마지막 남긴 동영상 기록이다. 그 죽음을, 비참을, 슬픔을 그 자체로 보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촉발한다. 인류가 존재한 시초부터 상징과 제의를 통해 그냥 그대로의 슬픔에 직면하는 고통을 완화해온 것도 그런 이유다. 상징도 제의도 없이 슬픔을 그냥 마주하는 일은 무시무시한 일이다. 그런데 그냥 그러고 있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냥 와서 피켓만 들고 있다구요. 그냥 이것만 한다구요.”

 

 

   아직 돌아오지 못한 아이, 은화의 엄마는 그냥 그러고 있다고 내내 말한다. 그냥 그렇게 서 있는 엄마를, 슬픔을 그냥 마주해야 하는 고통을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고통의 크기를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냥’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사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유족들이 그냥 슬픔을 감당하고 있는 게 아니라, ‘뭔가 거저먹으려 든다’고 매도한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밥을 그냥 준다고 할 때는 도둑이거나 ‘종북’으로 모욕 주기에만 바쁜 실정이다. ‘그냥’은 이유를 따지고 도구적 계산을 앞세우는 입장에서 볼 때 텅 빈 무엇처럼 보인다. 그 텅 빔을 마주하는 건 또 다른 의미의 무시무시함이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뒤 1년, 한국 사회는 서로 상반된 맥락에서, ‘그냥’을 마주하는 섬뜩함에 사로잡혀 있다.

 

 

   한국어에서 그냥은 공짜나 ‘거저’와 같은 뜻이 아니다. 한국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그냥은 단지 부사로서만이 아니라 맥락에 따라서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는 담화 표지의 기능을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그냥’은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공짜라는 뜻으로 왜곡·축소되었다. 한국 사회는 ‘어떤 목적이나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그냥 인간이나 세상을 이해할 능력을 상실했다. 있는 그대로, 그 자체의 모양을 이해하고 대면하는 것이야말로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존재의 가치를 살피는 일이다.

 

 

   슬픔과 밥이 ‘그냥’의 쓰임과 관련이 깊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밥과 슬픔을 계산하지 않고 함께 나누는 게 당연했던 삶의 흔적이 언어의 쓰임에 남아 있다. 공짜가 아닌 그냥 나누는 밥, 계산될 수 없는 슬픔, 이는 인간 사회의 근원적인 영역이자 어떤 이유나 조건도 없이 모두에게 허용된 ‘공통의 것’이다. 그러니 그냥은 없고 공짜만 있는 사회란 공통된 것은 없고, 차별만 존재하는 사회이다. 근본은 없고 계산만 남은 사회이다. 결국 이 계산은 ‘목숨 값’이라는 무시무시한 조어를 낳는다.

 

 

   ‘그냥’의 세계를 매도하고, ‘그냥’을 나누려는 모든 움직임을 공짜나 거저 혹은 얼마인가의 맥락으로 환원해버리는 일은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심각한 상징적 폭력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적 폭력에 맞서 많은 사람들이 ‘그냥’의 세계를 살려내고 있다. 별다른 이해관계도 없는 무수한 이들이 그림, 사진, 플래시몹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해서 슬픔과 분노를 나누었다. 상징도 제의도 박탈당한 채, 거꾸로 상징 폭력에 시달려야 하는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를 나누며 그렇게 사람들은 예술을 만들어왔다. 예술이 ‘무사심성’을 바탕으로 한다는 건 바로 이런 뜻이다. ‘공짜인가 아닌가?’만 묻는 상징 폭력에 맞서 ‘그냥 그렇게’ 하기를 계속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세월호 이후 우리 앞에 도래한 ‘예술’의 세계이다. 함께 슬퍼하기를 거부하는 정치공동체(국가)와, 공짜냐 아니냐만 묻는 경제 집단을 넘어, 오늘 우리는 모두의 이름으로 그냥 그렇게 문득 출현한 새로운 ‘공동체’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권명아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2월27일, 도쿄의 ‘이레귤러 리듬 어사일럼’에서 좌담회가 열렸다. 몇번이나 찾아갔던 길이지만, 여전히 또 길을 헤매었다. 그날 좌담회에서는 “인문 장치를 발명하자”라는 주제로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이 다양한 고민과 모색을 함께 나누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야기 도중 문득 누군가 한탄 조로 조용하게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라고 되묻던 장면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3월15일에는 오사카의 ‘시어터 세븐’에서 <구럼비, 바람이 분다>(조성봉 감독) 상영회가 열렸다. 헤노코와 요나구니 섬과 강정을 서로 연결하여 논의하는 토론 시간이 흥미로웠다. 한 청중은 헤노코와 강정을 논하며, “엄청난 공권력의 힘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맨몸으로 싸우는 일이 때론 무기력하게 느껴진다”며 “과연 이런 싸움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도쿄와 오사카의 자그마한 공간에 모인 사람들은 불안한 미래를 위해서든, 평화를 위해서든 함께 손을 잡고 걸어 나아가야 한다는 공감을 나누었다. 유명 초청 인사도 거창한 기자회견도 없이, 작은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의 만남은 이른바 ‘한-일 관계’라는 외교적 수사의 맥락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일인지 모른다. 또 만남과 대화와 연구를 해나가도 도무지 변할 것 같지 않은 엄혹한 현실 앞에서 이런 자리는 그저 무의미한 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계속 시도해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 무엇을 해도 결국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다시 떨어져 버리는 악순환에 대한 공포는 불안한 미래 앞에 선 모든 이들이 껴안고 있는 정동이다. 그런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은 없지만, 적어도 그런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만나서 함께 걸어 나아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첨단기술의 지도로도 도무지 찾을 수 없던 장소들을 찾아 며칠, 몇년을 헤매던 시간 속에서 문득 길 찾기에 대한 오랜 비유를 떠올리곤 했다. 길이 끝난 곳에서 다시 길을 만들어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밀고 나아가는 일이라는 오래된 비유법 말이다. 누구도 길의 끝을 보지 못했지만, 먼저 걸어간 자취가 있어 길이 끝난 곳에서 다시 길을 만들어나간다. 인류라는 이름은 이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온 발걸음의 총합으로 얻어진 이름이다. 인간을 역사적 존재라고 하는 건 이런 뜻이다. 역사적 존재로서 인간은 앞서 걸어 나아간 이들로부터 무언가를 물려받기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일 수 없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몰려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삶이 몰역사적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 투쟁이란 그 누구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내몰리지 않게 만들기 위한, 존재를 내건 싸움이다. 역사 투쟁이 분과학문의 몫이나 과거사 논쟁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가령 <구럼비, 바람이 분다>에서 구럼비에 부는 바람은 자연사의 순환이나 인간의 역사로 환원되지 않는 그런 ‘역사’를 상기시킨다. 온몸으로 맞서도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저 거대한 힘들도 언젠가 저 바람에 무너지고, 또 다른 세계가 열릴 것이다. 그 세계를 내가 살아 만나지 못할지라도 지금, 여기에 부는 바람을 느끼는 이 순간만큼은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감지한다. 그렇게 구럼비에도 도쿄와 오사카의 지도로도 찾을 수 없던 그 자리들에도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2015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해방’ 혹은 ‘종전’ 70주년을 기념하는 잔치들이 떠들썩하다. 몰역사적인 기념식장의 야단법석은 내버려두고, 죽은 시인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한국도 일본도 말고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한번 가보면 어떨까.

 

 

 

 

 

 

영혼을 탈환하라!

 

 

권명아

 

 

 

 

   일제 시기 ‘국민학교’를 다녔던 작가 박완서는 이 시절의 기억을 여러 작품에 남겨두었다. 주소나 생활 기록 같은 신상에 대해 선생님이 질문할 때 제대로 답을 못할까 전전긍긍했다는 기록은 작품 곳곳에 나타난다. 신상 기록을 달달 외우며 ‘심문’에 대비했다는 이 소략한 에피소드의 이면에서 우리는 일제 시기 ‘국민학교’ 교육의 흥미로운 특성을 포착할 수 있다. 1931년생인 박완서가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인 1938~39년께는 일제가 이른바 ‘국민정신총동원령’을 내리고 국민의 ‘정신’을 통제하는 데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국민정신총동원의 구체적인 내용을 여기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핵심은 선전전과 심리전을 전쟁의 전방만이 아니라 후방의 모든 일상 영역에까지 실시하는 것이었다. 이 시절 언론 자료에서는 ‘국민학생’이 수상한 자를 ‘스파이’로 의심된다며 신고해서 포상을 받았다는 기사를 자주 볼 수 있다. 학생들은 집에서 부모들이 조선어를 쓰지는 않는지, 수상한 자가 동네에 출몰하지는 않는지 항상 감시하고 학교에 보고하도록 ‘교육’받았다. 초등학교에까지 시행되었던 국민정신총동원은 인간의 영혼을 통제하고 조작하고 실험하는 대상으로 장악하려 했던 파시즘 정치의 전형이다. 이 시기에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교육을 기술 및 실용 위주의 실업교육 중심으로 강제로 재편했다. 식민지 ‘국민’을 기술 중심의 도구적 인력으로 한정하는 대신, 영혼을 관리하는 역할을 소수의 엘리트만이 담당할 수 있도록 통제한 것이다. 즉 국민정신총동원이란 인간의 영혼을 전쟁 수행의 도구로서 통제 관리하며 이를 위해 영혼을 다루는 기술을 소수 엘리트가 독점하는 통치술이었다. 역사적 파시즘 체제가 고도로 발전시킨 이러한 영혼 통제의 기술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거듭 변신하며 출현하고 있다.

 

 

   여러 매체에 ‘선전전’, ‘인문교육 폐지, 기술교육으로 전환’과 같은 말들이 난무한다. 국정원 대선 개입과 교육부의 ‘인문학 폐지’라는 전혀 이질적인 국면은 영혼을 통제하고 관리하려는 파시즘의 오래되고도 새로운 기술의 연장에서 사유해야만 한다. 탈냉전과 함께 폐쇄적인 국민국가의 장벽이 무너지고,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네트워크 사회가 도래하면서 파시즘 체제가 만든 고전적인 영혼 통제는 이제 불가능하다는 낙관론이 지배적이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페이스북의 감정 조작 실험 사례가 보여주듯이 네트워크 사회에서 영혼에 대한 통제는 과거와는 다르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더욱 가속화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냉전 체제가 ‘유물’로 살아 있는 사회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진행되는 각종 영혼 통제 기술들은 파시즘 체제의 역사적 유물과 네트워크 사회의 신기술이 접목된 사상 초유의 변종인 셈이다.

 

 

   그러므로 영혼 통제 기술과 관련된 이토록 희귀한 역사의 유물들이 새로운 기술과 접목되어 나타나는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영혼을 둘러싼 각축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전쟁터다. 아니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영혼은 억압적인 국가 기구와 자본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버렸다. ‘댓글 조작’과 ‘인문학 폐지’라는 이질적인 국면은 영혼을 통제하려는 일련의 공통된 전략이라는 점에서 사유하고 대처해나가야 한다. 이는 국민을 선전전의 대상으로만 보면서, 영혼 통제의 전문적 기술을 소수의 엘리트만이 독점할 수 있는 배타적 특권으로 만들었던 고전적인 통제 기술의 연장에 있다. 그런 점에서 억압적인 국가 기구와 자본의 손아귀에 사로잡힌 영혼을 탈환하는 것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중대 전환점이 될 것이다. 그러니 영혼을 탈환하라! 인문을 탈환하라!

 

 

 

 

 

 

 

노인과 진보

 

 

권명아

 

 

 

 

 

   팔십이 넘은 할머니가 일흔 어름의 할머니에게 “한창 좋은 때다”라고 말하는 풍경이 참 먹먹했던 적이 있다. 늙음과 젊음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몇 백 년을 살았는지 가늠하는 게 헛된 고목 아래 앉아 나이듦에 대해 묻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곱씹어본다. 유용하고 무용한 세상의 지식을 많이도 들춰보았지만, 나이 들며 마주하는 낯설고 두려운 질문에 대해 그 지식의 서재에서 답을 찾기는 참으로 어렵다. 세상을 향해 서슬 퍼런 목소리를 내고 조언과 진단을 서슴지 않는 지식인에게도 나이 들며 부딪치는 질문은 그저 홀로 침잠해야 하는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된다. 물론 건강에서 재테크까지 나이 들면서 챙겨야 하는 일들을 조언해주는 정보는 넘쳐난다. 그러나 나이듦과 정치라는 두 항을 이어주는 지식이나 담론은 거의 부재하다.

 

 

   다만 세대 논쟁만이 뜨겁다. 세대 논쟁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와 나이듦에 대해 생각해볼 수는 없을까? ‘진보, 혁명, 변화.’ 이런 단어에서 우리는 암암리에 젊음, 청춘을 연상한다. 보수가 ‘늙음’, 오래됨과 자연스레 연결되듯이 진보는 언제나 ‘젊음의 것’이었다. 이는 근대 주체가 형성되어온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다. 그러나 ‘보수=늙음’, ‘진보=젊음’이라는 식의 의미 연결을 넘어서지 않는 한 우리는 정치적 주체에 대해 진부한 세대 논쟁을 넘는 새로운 담론 지형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진보라는 개념 자체가 ‘앞으로 나아간다’(progress)는 의미를 지녔기에, ‘젊음’의 시간성을 그 바탕에 두고 있다. 이론적 입장에 따라 진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데 차이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래된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생태주의나 근대적 개념이 인간 모두를 자유롭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굳이 ‘진보’라는 개념을 선호하지 않는 것도 이런 맥락이 있다. ‘진보’라는 개념은 품을 수 있는 주체가 한정적이다. 문제는 이러한 한계를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기득권 수구 집단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사유는 때로, 아니 언제나 현실에 뒤진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원래 살던 대로 살 권리’를 요구하는 밀양 할매들의 십년이 넘는 투쟁은 ‘청년 진보’라는 표상을 뒤흔들었다. 또 혐오를 무기로 삼는 청년 우익의 등장은 보수가 더 이상 오래된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뼈아프게 환기시켰다. 그러나 ‘밀양’을 ‘진보정치’의 맥락에서 사유하는 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듯이, ‘진보정치’의 맥락에서 나이듦을 사유하는 것은 아직은 시작 단계다.

 

 

   나이듦을 단지 숫자로 환원되는 ‘나아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나이듦은 육체의 나아감을 측량하고 관리하는 기술과 학문의 대상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노화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나아감에 속한다. 그러나 나이듦이란 신체적 상태의 변화와 생각, 정서, 관계 맺음, 삶과 사회에 대한 태도의 변화 역시 함축한다. 이는 단지 노화에 국한되지 않는 존재론적 나아감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나아감이야말로 정치적 사유가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근원적 차원이다.

 

 

   젊은 세대의 호감을 얻기 위해 청바지에 가죽점퍼를 입고 청년 문화에 동참하는 진보정치의 노력은 가상하다. 그러나 이런 ‘청춘의 코스프레’는 어쩌면 나이듦에 대한 진보정치의 불안의 표상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이듦이라는 차원을 이론과 실천 속에서 감당하지 못한다면 진보정치는 그 자체의 나아감에도 근원적인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청바지를 벗고,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종편의 괴성으로 상쇄시키고 있는 저 ‘고집불통의 노친네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민중 속으로’ 나아가는 진보정치의 길인지도 모른다.

 

 

 

 

 

 

사랑의 깃발이 드높다

 

 

 

권명아

 

 

 

 

 

 

   히틀러의 ‘그것’에 대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것’이다. 히틀러의 ‘그것’에 대한 논의는 그가 동성애자라거나 위장한 동성애자라는 소문으로도 이어졌다. 히틀러는 동성애자를 유대인만큼이나 혐오했다. 동성애에 대한 히틀러의 강박적 혐오 때문에 히틀러의 ‘그것’에 대한 뜬소문이 끊이지 않았다는 논의도 있다. 그래서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반파시즘 진영에서 동성애 코드를 활용하여 나치를 희화화하는 방식이 자주 나타나곤 했다. 역사적으로 파시즘과 반파시즘은 동성애를 ‘절멸의 대상’이나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였다.

 

 

   <한겨레>가 동성애 혐오 발화를 전면 광고로 게재하여 물의를 빚었다. 논란이 일자 한겨레 쪽이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 입장을 가진 의견 또한 정보”라고 해명했다. 이는 혐오 발화의 폭력성에 대한 무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혐오 발화는 ‘의견’이 아니고, 표현의 자유로 보장될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혐오 발화를 하나의 ‘의견’이라고 하는 것은,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한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 사태를 통해 우리는 한국 사회가 여전히 혐오 발화의 폭력성을 사유하고 대처해 나가는 데 무지하다는 점을 거듭 확인해야 한다. 파시즘은 증오 정치를 동력으로 진행된다. 파시즘은 낙인찍기, 혐오 발화, 증오 행동을 거쳐 대량 학살로 향했다. 혐오 발화가 하나의 ‘의견’이나 ‘보수적인 정치적 견해’가 아니라, 학살의 예고편이라는 것은 무수한 사례가 보여준다. 그 사례들에 따르면, 혐오에는 이유가 없다. 혐오란 이유가 없이, 대상을 바꿔가며 들러붙는 신체적 힘들의 결집체이다. 파시즘이 여성, 성적 소수자, 인종적 타자를 혐오하며 절멸시킨 데에는 어떤 논리적 이유도 없다. 물론 이들이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은 이들 집단이 당대 주요하게 부상한 ‘새로운 세력’이라는 점과도 관련된다. 대표적인 파시스트인 무솔리니는 파시즘이란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안티테제”라고 주장했다. 즉 파시즘의 혐오는 논리적 근거가 아닌, ‘안티’의 역학을 따라 촉발된다.

 

 

   최근 한국 사회의 혐오 세력이 특별한 공통점이 없는 집단들을 향해 혐오 발화와 증오 행동을 수행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그때마다 ‘쟁점이 되는’ 집단을 찾아다니며 혐오 발화나 방해 시위를 자행하고 있다. 혐오가 특별한 이유가 없이, 대상을 바꿔가며 들러붙는 신체적 힘들의 결집체라는 건 바로 이런 뜻이다. 혐오가 대상에게 부정적으로 들러붙는 속성을 지닌다면, 그 강도가 높을수록 혐오의 주체는 대상에 들러붙어 휘감겨버린다. 히틀러가 동성애를 혐오하는 강도가 높아질수록, ‘그것’에 대한 추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한편 최근 서울시민인권헌장을 둘러싼 사례에서도 보이듯이, 혐오의 강도는 이에 맞서는 저항의 강도를 높이기도 한다. 물론 혐오 덕분에 저항이 가능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혐오에 맞선 사랑은 추상적으로 논의된 사랑의 정치성에 구체적인 현실성을 부여했다. 이 일은 ‘나른한’ 진보 이론의 대가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혐오에 맞서 행동한 수많은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2014년 한국 사회는 혐오에 맞서는 새로운 ‘사랑의 깃발’과 그 사랑으로 형성된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을 만난 해로 기록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혐오의 공허한 열광을 마주하며, 우리는 단지 파시즘의 도래만을 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한국 사회의 정치적 지형도가 다시 그려지는 현장을 보고 있다. 2014년, ‘진보’라는 말로 다 포함할 수 없는, 혐오에 맞서는 새로운 저항의 정치가, 사랑이 일어나고 있다.

 

 

 

 

 

 

 

무상급식과 유턴 정치

 

 

 

권명아

 

 

 

 

 

   지방대 교수들끼리는 매사 너무 지나치게 열심인 동료를 두고 “그 사람 요즘 편입 준비하나 보다”라며 냉소적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기회만 되면 서울로 ‘유턴’하는 지방대 교수들의 풍토를 보여주는 씁쓸한 사례이다. 지방을 서울로 유턴하기 위한 반환점 정도로 생각하는 대표적 집단이 교수와 정치인이다. 이들에게 지방은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업적을 쌓는 거점일 뿐, 돌보고 지키고 함께 살아가는 터전이 아니다. 이들이 쌓는 업적도 결국 서울로 돌아가기 위한 목적에 부응하는 일일 뿐 지방을 돌보는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들을 ‘유턴족’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교수나 정치인이나 ‘유턴족’들이 지방에 와서 하는 일은 주로 서울로 ‘돌아가기’ 위한 유턴 정치뿐이다.

 

 

   현재 과격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무상급식 폐지 선언은 그 본질에 있어서 정치인들의 유턴 정치의 무책임한 결과이다. 무상급식 폐지 논란이 왜 경남에서 선정적일 정도로 선동되는지를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남에서는 무상급식을 ‘경남의 자부심’이라고도 표현한다. 그러나 무상급식 논란에서 막상 경남 지역은 사라져버렸다. 홍준표 지사는 이 논란 덕택에 대선 주자로서 한자릿수의 지지율을 얻는 ‘결실’을 얻었다고 한다. 도지사가 ‘아이들 밥그릇’으로 유턴 정치에 열심인 사이, 도민들의 자존심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홍준표 도지사가 내동댕이친 ‘아이들 밥그릇’은 실은 김두관 전 도지사의 ‘작품’이기도 했다. 야권 불모지 경남에서 53.5%의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김두관 전 도지사가 ‘대권’을 위해 유턴해버렸고 경남도민의 자존심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홍준표 도지사의 당선은 그런 점에서 김두관 전 도지사의 유턴 정치에 대한 도민들의 강력한 심판 의지의 결과였다. 유턴 정치에 대한 심판으로 당선된 도지사가 다시 유턴 정치를 위해 경남도민의 ‘밥그릇’을 내동댕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왜 경남도민들은 일어나서 분노하지 않느냐는 질타를 받기도 한다. 결국 보수정당 텃밭인 경남 사람들의 정치 성향이 문제라는 비판도 들린다. 자주 듣는 진단이고,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비판을 하는 이른바 지식인들도 결국 선거 때 말고는 지방의 사정에 관심이 없다. 이런 식의 지방 비판은 지방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선거 결과만으로 고질적 지역주의 운운하는 사람들이나, 지방을 표밭으로만 보는 정치인들은, 지방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고 가꾸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줄 모른다. 도지사들이 차례로 밥상 뒤엎는 모양을 내내 지켜보아야 했던 경남도민들은 분노하기보다 냉랭하다. 이 냉랭함이 정치 무관심과 같은 것일까? 내동댕이쳐진 밥상으로 더렵혀진 방구석을 치우는 이들은 화를 내기보다, 냉정하게 이를 앙다문 채 뒤치다꺼리를 할 수밖에 없다. 뒤치다꺼리를 하는 일이야말로, 살림을 꾸리는 이들이 맡아야 하는 몫이기 때문이다. 화를 내는 건 살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떠나면 그만인 ‘유턴족’들과 멀리서 불구경하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유턴 정치는 모두 서울 중심주의의 결과이지만, 교수의 유턴이 학벌 사회와 관련된다면 정치인의 유턴은 지역 자치가 불가능한 정치 구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런 구조가 변화되지 않는 한 선거는 결국 지방을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선거는 근본에서 대의민주제의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지방의 맥락에서 선거는 지방을 중앙의 식민지로 만드는 노예화의 도구에 불과하다. 분탕질 뒤끝의 심판도 살림도 결국 지방 사람들의 몫이다. 그 뒤끝이 선거 결과만으로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뒤끝의 매서운 맛을 볼 날이 오리라.

 

 

 

'막장 달인'들이 지배하는 사회

 

 

 

권명아

 

 

 

 

 

   태풍이 불면 바다 심연에 있던 것들이 기슭으로 올라온다. 태풍이 지난 후 백사장을 가득 채운 쓰레기 더미는 충격적이었다. '저 바다 깊은 곳에 이런 쓰레기가 가득했었구나.' 그 쓰레기들은 항상 바다 저 멀리 심연에 있었을 터이지만, 사람들이 사는 기슭으로 올라오기 전에는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었다. 2014년 한국 사회에는 일 년 내내 태풍이 불고 있는 모양이다. 매일매일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무수한 쓰레기가 '한국 사회'의 기슭으로 올라온다. 이제 한국 사회가 바닥을 보인다는 말도 너무 자주 듣고 말해서 물려 버렸다.
 


심연의 유령들, 고딕 판타지의 시작
 
   그런데 이제, '심연, 바다' 같은 표현을 더는 심상하게 쓸 수 없다. 2014년 바닥을 보인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심연, 바다' 같은 표현조차 집단적 트라우마를 환기한다. 우리는 이미 상징이나 비유가 아닌 현실로, 생생하게 한국 사회의 바닥을 보았다. 
 
   태풍이 불지도 않았는데, 바닥을 드러낸 채 뒤집힌 세월호는 '바닥' '심연'을 상징 차원에서 현실로 불러들였다. 바닥을 드러낸 세월호가 무슨 전조이기라도 한 것처럼, 줄줄이 한국 사회의 심연에서 '유령'들이 밀려온다. 심연으로 사라진 아이들은 돌아올 줄 모르는데, 사라진 줄 알았던 과거의 유령들은 죽지도 않고 되돌아온다. 파시즘이 지배했던 스페인을 고딕 판타지로 그려낸 영화 '판의 미로'에는 아이를 살아 있는 채로 잡아먹는 괴물이 나온다. 피 맛에 굶주린 이 괴물은 그 자체로 파시즘의 상징이다. 고딕 판타지 장르를 빌려 말하면, 오늘 한국 사회에는 바다의 심연에서 아이들을 살아 있는 채로 잡아먹은 유령들이 피 맛에 굶주려 배회하는 모양이다. 남미의 문학이나 영화는 고딕 판타지나 마술적 리얼리즘이 지배적인 장르로 활용된다. 폭력과 학살로 점철된 남미의 역사적 경험은 통상적인 사실주의나 리얼리즘으로 재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도 말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 역시 리얼리즘이 불가능한 고딕 판타지의 세계로 넘어가는 듯한 조짐을 보인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는 '에로-그로'라는 장르가 유행했다. 일본에서 유행하던 이 장르는 에로티시즘과 그로테스크가 결합한 독특하고도 복합적인 성격을 지녔다. '에로'와 '그로'가 결합해서 만들어내는 미적, 정치적 효과는 다양했다. '에로-그로' 장르에서 나타나는 '과도한' 성적 표현은 성 해방에 대한 열망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 오히려 1930년대를 전후하여 나타나는 폭력의 기괴함과 폭력에 몸을 내맡기는 대중의 충동이 '파괴적인 죽음 충동'으로 충만한 '에로-그로'라는 장르를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일본의 파시즘이 극단화되면서 '에로-그로'는 전쟁 광기를 선동하는 수단으로 동원되기도 하였다. 

   파시즘의 역사를 참조해서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펴볼 때 눈여겨볼 지점은, 파시즘의 폭력성은 매우 다양하고 이질적인 장르 복합체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파시즘의 역동성과 '자발적 광기의 분출'은 이런 면모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파시즘의 폭력성과 그 전조를 단선적인 회색 톤의 억압적이고 건조한 장르로 생각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일면적이다. 파시즘의 폭력은 일방적이지만, 그 폭력의 형태는 그야말로 '버라이어티'했다.


버라이어티 장르, 파시즘 

   2014년 정치 뉴스는 '19금' 경고 자막이라도 넣어야 할 만큼 어처구니없이 에로틱하다. 사회 뉴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로테스크하다. 게다가 '에로'와 '그로'는 종종 몸을 바꾸고, 때론 이종 교배를 일삼는다. 이런 버라이어티 장르를 창출하는 것은 물론 지배적인 미디어와 정치 집단이다. 그러나 이런 버라이어티에 열광하는 대중 또한 파시즘이라는 복합적인 장르의 발명자들이다. 물론 대중을 이렇게만 규정할 필요는 없다. '에로-그로', 고딕 판타지, 이름 붙일 새도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수한 막장 장르를 한국 대중들은 아주 오래도록 '관람'해 왔다. 한국 사회는 여러모로 막장의 달인들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막장 장르의 주도권이 지배 집단에 있는 듯하지만, 막상 관람자의 자리에서 채널의 주도권을 놓지 않고 있는 대중 역시 만만치 않은 막장의 달인들이기 때문이다. 

   지루하게 무한 반복되는 막장 드라마를 끝내고 새로운 장르를 발명할 기회는, 그러니까 이제 우리 모두에게 달렸다. 2014년이 고딕 판타지로 마무리되고 있는 바로 오늘 말이다.

 

 

 

경제위기와 폭력적 언어유희

 

 

 

권명아

 

 

 

 

 

 

   대공황이 다시 오는가? 경제학자들도 이에 대해 쉽사리 예측하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대공황은 파시즘의 득세와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문화사적 자료를 참조해 볼 때 대공황의 시대는 격렬한 휘발성의 시대였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 대공황은 마치 세계가 격렬하게 휘발되고 있는 것 같은 공포로 다가왔다. 쓸모없는 종이더미가 된 지폐 다발들이 상징하듯이, 대공황은 기존의 물질적인 경제적 토대를 휘발시켜 버렸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의 휘발성이란 단지 상징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 시대가 '격렬한 휘발성의 시대'였다는 것은 아주 작은 불씨에도 금세 불타올라 버렸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정체가 모호한 '적'을 향해 불타오르는 증오와 적대감은 대공황 시대의 정동(affects)이었다. 
 


대공황, 경제를 잃고 적을 얻은 시대
 
   이런 점에서 히틀러는 대공황 시대의 전형적 산물이다. 히틀러와 파시즘이야말로 이 세계를 격렬한 휘발성으로 불태워 버리고자 했으니 말이다. 격렬한 휘발성은 파시즘 언어에서도 발견된다. 파시즘 시기 언어는 내용, 의미, 가치, 구체성, 책임성과 같은 실체를 상실한다. 프리모 레비는 이러한 '언어의 폭력적 변형'이 파시즘의 특이성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현상을 찰리 채플린은 영화 '위대한 독재자'에서 흥미롭게 묘사하였다. 연설광이었던 히틀러가 적에 대한 증오와 선동으로 가득 찬 언어를 구사할 때, 말은 내용과 의미를 상실한 '이상한 소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경제 불황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낯익은 '적'을 불러내어 책임을 전가하는 소란이 잦아진다. 경제는 황폐해지고 사회 갈등이 고조되고, 공동체의 위기는 해결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 오늘날 우리는 곳곳에서 이러한 격렬한 휘발성의 증상과 마주한다. 경제 논리를 정치로 환원하는 것을 넘어서, 이제 경제는 '적'을 비난하는 폭력적 언어 속에서 휘발되어 사라져 버렸다. 많은 전문가가 지적하듯이 대공황은 막을 수 없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당대 집권 세력들이 경제 불황을 해결할 실질적 대책을 무시하고,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적대와 증오의 말들로 그 책임을 휘발시켜 버린 결과 대공황이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그 휘발된 언어에 휩쓸려 버린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너무나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2014년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경제 불황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누구도 그 책임을 지지 않는다. 집권 세력은 매번 낯익은 적을 불러내어 책임을 전가할 뿐이고, 이제는 언어의 폭력적 변형에 스스로 매혹된 것처럼 보인다. 평범한 사람들은 불황의 고통을 매일매일 감수하고 살아야 하고, 거기에 더해서 폭력적이고 무책임한 언어의 '향연'을 관람해야 하는 참담함까지 감내해야 한다. 

   한편 무책임한 휘발성의 언어가 발산하는 적대의 향기에 심취한 이들은 앵무새처럼 '적'을 공격하는 말로 현실의 고통을 해소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들은 자신의 주머니 속 화폐다발의 가치도 해소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2014년 겨울,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세상은 마치 '시끌벅적하고 분노로 가득한 소리들이 넘쳐나지만 무의미한 영화'와도 같다. 과거나 현재나 대공황이란 경제와 언어와 정동의 특별한 결합물이다. 경제 위기의 실질적 해결과 책임이 '폭력적 언어유희'에 전가되어 버린 결과 우리 사회는 경제를 잃고 대신 '적'과 '적대의 언어'만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경제를 '파괴적 언어유희'로부터 구출해야만 경제 불황에 대한 책임도 물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언어의 가치를 살피는 일이야말로, 경제 불황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가는 출발점이라 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언어라는 문, 그 탈출구를 점거할 시간이다. 문은 이미, 항상 거기에 있다.


불황의 책임을 묻고 언어의 가치 살펴야 

   "귀청이 터질 듯한 배경 소리에 잠겨 허우적대는, 이름도 얼굴도 없는 사람들의 난리법석, 그럼에도 그 위로 인간의 말은 떠오르지 않는 영화. 잿빛과 검은빛의 영화, 유성영화인데도 말이 없는 영화." 목청을 높여 적들을 물리칠 것을 외치고 마치 적을 마주한 듯이 괴성을 지르며 법석을 떠는 어떤 종편 채널의 소리를 뒤로 하며, 수용소로 들어가는 것은 바로 폭력적 언어로 가득 찬 세계에 무기력하게 끌려들어가는 일이었다는 프리모 레비의 말을, 아무 소용없이 떠올려 본다. 겨울이 다가온다. 모두 무사하고 안녕하시길 마음 깊이, 그러나 역시 아무 소용없이 빌어 본다.

 

 

 

 

청년 이탈 100% 향해 진격하는 부산시

 

 

 

권명아

 

 

 

 

 

 

   2012년 부산시의회는 '부산 청년대학생 정책욕구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부산에 있는 대학에 다니는 학생 중 졸업 후 부산에 계속 거주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학생은 51.2%에 불과하다. 또 이 조사에 따르면 부산 청년 대학생들이 부산에서 개선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으로 꼽은 것은 인적 자원 개발 프로그램과 일자리 창출 노력이다. 달리 말하면 현재 부산 지역 청년 대학생들에게 부산에서 자신들이 어떤 '인력'으로 성장할지 미래를 그려낼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재 양성 전망 등 '미래'를 달라는 청년들
 
   이는 청년들의 일자리에 대한 불만이 '일자리가 적다'는 식의 양적 문제가 아니라, 내가 커 나갈 수 있는 미래적 전망을 가진 일자리가 없다는 불만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조사에서 많은 학생이 월급 때문이 아니라, '미래' 때문에 서울과 수도권으로 가고 싶다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즉 청년들에게 부산에서의 자기 삶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는 청년들이 부산시의 인력 정책에 대해 다양성, 비전, 변화 가능성, 진취성과 같이 사람을 '키우는' 미래적 전망을 요구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청년들은 부산시에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상상력을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청년들이 부산에서는 주체적인 미래를 만들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부산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영역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서울이나 수도권과 비교해 부산에서 젊은 세대가 주도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이 거의 없다는 것은 굳이 통계가 없이도 실감할 수 있다.

   청년들이 자기 미래를 꿈꿀 수 없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지역에 자립적 삶의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이다. 미래는 꿈꾸는 것이다. 즉 미래란 그저 물리적 시간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과는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는 자립과 주체적 삶에 대한 열망으로 도래하는 것이다. 

   청년층의 부산 이탈에 대해 부산시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또 청년층의 부산 이탈에 대한 논의가 부산의 인구 감소를 걱정하는 인구 통계학적 관점이 아니라 지역의 삶과 문화에 대한 성찰로 진전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부산 청년 창업 지원센터 추진이나 부산 청년문화 육성 조례(2013년 5월 22일) 제정은 이러한 정책적 관심이 확대된 결과이다. 

   부산 청년문화 육성 조례의 경우 지역의 자립과 주체적 삶에 대한 열망을 청년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에서 구하려는 정책적 반영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상 이 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문화 정책이기도 하다. 문화(culture)의 원뜻이 '키우다'(cultura·경작하다)라는 문화 이론의 원론을 새삼 거론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실질적 차원에 있다. 

   예를 들어 부산시 의정지원 자료인 '부산문화재단 비전, 핵심가치, 추진 방향 분석'(2012년)에서는 '인재들의 역외 유출'을 부산시가 처한 총체적 위기 상황의 핵심 요인으로 진단하고 있다. 그리고 부산문화재단의 존재 이유는 이와 같은 총체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문화 분권'의 초석을 놓는 일이라고 논하고 있다.


미래 키우는 일, 부산문화재단의 존재 이유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부산문화재단의 존재 이유는 문화 사업에 국한되지 않고, 부산의 자립적 삶의 기반과 문화주권을 정초하는 데 있다. 또 앞서 인용한 자료들은 부산시 자체에서 수립한 정책 자료들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부산문화재단 민간 이사장 선정 문제는 단지 문화계의 진영 문제나, '인물' 품평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부산문화재단 민간 이사장 선정 논란을 이런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제기하지 못한 채 공전할 우려가 높다. 

   부산문화재단 민간 이사장 선정 논란의 핵심은 부산시가 청년들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도시, 즉 자립과 주체적 삶이 가능한 지역을 만들겠다는 정책적 기조를 스스로 배반한 꼴이 되고 말았다는 점에 있다. 그런 점에서 부산문화재단 민간 이사장 선정의 문제점은 부산시가 그간 추진해 온 정책 기조를 스스로 부정해 버린 데 있다. 인사가 정책을 부정해 버린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제 청년 이탈 100%의 기록을 세우는 일만 남았다.

 

 

 

 

예방과 검열, 사전 조치의 희극

 

 

 

 

권명아

 

 

 

 

 

 

   유효성에 대해서는 의학적인 논란도 있지만, 예방 접종은 질병 발생에 대비하는 유효한 사전 조치의 하나이다. 그러나 발생 가능한 질병에 대한 예방 조치가 때로는 과도한 건강 염려증과 감염 공포를 동반하기도 한다. 예방 조치란 개입의 시기와 발생 가능성에 대한 적절한 판단과 분석 능력에 따라 그 효율성과 가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예방 조치가 적절하게 취해지는가, 아니면 부적절하게 취해지는가는 그 사회의 합리적 판단 능력과 분석 능력을 나타내는 근본적 지표이다. 물론 합리적 판단 능력과 분석 능력이 있을 때에만 예방 조치라는 것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다이빙 벨'과 에볼라, 사전 조치 필요 영역은?
 
   사전 조치에 대한 판단 능력과 적절성이라는 차원에서 최근 부산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개의 사건은 참으로 흥미롭다. 하나는 ITU(국제전기통신연합) 전권회의와 관련하여 에볼라 감염 사전 조치 논란이며, 다른 하나는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예정작 '다이빙 벨'에 대한 상영불가 조치 논란이다.
 
   10월 20일부터 열리는 ITU 전권회의는 정보통신기술 정책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전 세계 193개국에서 참가자들이 모이기에 여러 다양한 절차와 사전 조치들이 당연히 필요할 것이다. 특히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면서, 이에 대한 사전 조치를 부산의 시민 단체들이 요구하고 있다. 먼저 전제를 하고 싶은 것은 몇몇 보도나 성명에서 '에볼라 발병국' 참가에 대한 우려라는 식의 표현이 자주 사용되는 것은 문제적이다. 특정 지역이나 국가를 그저 '에볼라 발병국'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지나치게 폭력적이며 인종차별적이기 때문이다. 일본을 '피폭국가'로 부르는 것이 폭력적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질병 감염에 대한 사전 예방 조치를 철저하게 수행하는 것은 국제회의를 주관하는 국가와 지방 정부의 기본적 역할이자 책임이다. 그런데도 ITU 전권회의 주관 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 관계자는 국제회의 참가자들에게 이러저러한 사전 조치를 할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수수방관하고 있던 부산시는 논란이 커지자, "미래창조과학부와 협력해 에볼라 바이러스 발병국에 참가자 수를 최소화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예방 조치가 부산 시민의 안전에 대한 기본권을 보장하는 문제임에도 이를 책임질 부산시의 대응은 참으로 느긋하다. 

   부산국제영화제의 '다이빙 벨' 상영에 대한 부산시와 부산시장의 대응이 매우 기민하고, 집요하고, 적극적인 점을 전권회의에 대한 질병 예방조치와 비교해 볼 때, 이 대비는 더욱 흥미롭다. 국제영화제 참가작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상영불가 압력을 넣는 것은 부당한 검열이며, 사전 조치라는 의미에서 사전 검열에 해당한다. 사전 조치를 취할 질병 예방에는 무관심하고, 시민의 판단에 맡겨야 할 표현의 자유에는 적극적으로 사전 조치를 취하는 이 역설적 태도는 실상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부산시, 시민 기본권 지켜야 할 책임 안 지켜 

   2012년 제정된 '부산광역시 인권 보장 및 증진에 관한 조례'를 보면 부산시(3조)와 부산시장(4조)은 '시민의 인권 보장과 증진을 위하여 인권 보장 및 증진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할 책임을 지닌다. 안전하게 살 권리와 표현의 자유는 인권의 기본이다.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질병과 재난에서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사전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부산시와 부산시장의 기본적 책임이다. 마찬가지로 부산 시민들이 다양한 사상과 예술 표현의 자유를 구가할 수 있도록 보호하고, 이에 반하는 일들을 조사하고 예방하는 것 역시 부산시와 부산시장의 기본적 책임이다. 따라서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사전 조치에 무관심하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에는 적극적인 부산시의 행위는 부산시민의 기본권을 지켜야 할 자신의 최소한의 책임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조례도 지켜지지 않는 상황이라면 부산 시민은 도대체 기본권을 지켜 달라고 누구에게 요구해야 하는 것일까? 사전 조치의 적절성에 대한 부산시의 합리적 분석의 초점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합리적 판단 능력의 여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