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살을 앓는, 바로 거기

 

 

권명아

 

 

 

 

 

 

 

   온갖 논란 속에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 문학에 대해 우울하고 때로 혐오로 가득 찬 진단이 내려지고 있다.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함께 풀어 가느냐에 따라 미래는 달라지리라. 올 상반기 일본을 뜨겁게 했던 한 논쟁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일본의 민주주의와 반전을 위한 시민 행동에 대해 한국에서도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전쟁 반대로 모인 기저에는 매우 다양하고 이질적인 움직임들이 존재한다. 그중 단연 주목을 받은 것은 실즈(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이다. 정치에 무관심한 것으로 ‘유명한’ 일본 청년 세대가 반정부 반전 시위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일본 사회는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다. 그러나 논란도 많았다. 실즈 논평이나 지지자들의 발언에 대해 식민주의나 성차별적일 수 있다는 지적과 비판 또한 격렬하게 제기되었다. 운동의 열기를 꺾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과 사회운동에서 기존의 차별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격렬한 논쟁을 통해서 페미니스트와 차별 반대 운동 집단, 대학생과 지식인들이 서로 연결되었다. 논란의 여지는 여전하지만, 비판과 갈등, 공격이 난무하는 논쟁이 오히려 여러 힘들이 모이고 함께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어떻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함께 나아가기 위해 말을 나누는 방법이 될 것인지 고민하는 계기도 되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격렬한 논쟁은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전과는 다르게 말하고, 생각하고, 상상해야 한다는 그 ‘오래된 진리’를 다시 환기했다.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한 열정이 성명서를 시가 되게 하고, 거리시위의 구호를 새로운 음악으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 변화의 열정이 빚어낸 새로운 예술은 광화문 거리에서도, 남포동 한 모퉁이에서도, 안산의 거리에서도 오롯이 빛나고 있다. 변화의 열정이 새로운 예술을 추동하는 장면을 우리는 곳곳에서 본다. 예술과 문학과 인문학이 죽었다는 판관들은 이러한 현장과는 동떨어져 있다. 티브이와 뉴스를 장식하는 게 예술과 인문학의 전부가 아니다.

 

 

   오늘날 일본은 여러 지점에서 한국 사회와 유사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혐오 발화로 상징되는 배외주의가 만연하고, 대학 구조조정이 급격히 진행되면서 인문학과들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 청년 실업은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고, 대학 교육이 신자유주의적 논리에 잠식되어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이 사안들은 그간 당사자들의 문제로서, 비판 작업도 서로 별도로 진행되어왔다. 혐오 발화는 주로 ‘재일동포 문제’로 여겨졌고, 대학 교육은 대학 관계자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러나 혐오 발화가 소수자에 대한 일본 사회에 누적된 차별 의식의 결과라는 점에서 교육의 변화 없이는 혐오 발화의 근원적 제어는 불가능하다. 또 혐오 발화가 만연할수록 주변국에 대한 적대를 제어할 수 없고, 전쟁의 위기를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차별금지법 제정과 대학 구조조정 반대와 헌법 9조 수호, 그리고 청년의 미래가 각자 저마다의 의제를 지니면서도 연결될 수밖에 없다. 아니 이런 연결을 만들어냄으로써 갈등과 의견 대립 속에서도 변화를 향해 함께 걸어나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연결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뜨겁고 격렬한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의견 충돌과 비판을 통해 새로운 흐름을 여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나 부딪쳐서 깨져나가지 않는 한 제자리를 맴도는 반복을 피하긴 어렵다. 부딪쳐야만 비로소 열리는 새로운 흐름이 있다. 그 흐름의 가능성은 격렬한 의견 충돌로 몸살을 앓고 있는 바로 거기, 그 몸들 사이에 항상 존재한다. 냉소와 혐오는 몸살의 일부다. 냉소와 혐오를 넘어서야 몸살 후의 다른 몸을 얻는다. ‘문학’은 아직 몸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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