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은실  (한신대 연구교수)

 

70-80년대였다. 어릴 적 살던 곳 주변 담벼락에는 (당시는 ‘국민’학교라 불리었던) 초등학교를 들어갔거나 아직 입학을 하지 않았지만 어깨너머로 글을 깨우친 아이들이 붉거나 검은 글씨로 크고 작게 써 놓은 낙서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특히, 초등학교 근처 담벼락이 심했다. ‘얼레리 꼴레리 00랑 00랑 00했데요’라는, 군데군데 말이 00으로 비워져 있는 낙서도 있었다. 사실 그런 류의 낙서가 태반이었다. 가끔 실명도 등장했다. 정확히 무슨 말을 쓰고자 했는지를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었지만 또 무슨 말인지를 누구나 대충은 짐작하게 되는 내용이기도 했다. 종종 욕설 또는 생식기 모양을 한 그림이 그려져 있던 적도 있었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내용들이 태반이기는 했지만 아무도 굳이 그 낙서를 누가 왜 언제 했는지 밝히려 애쓰지는 않았다. 담벼락 욕설은 일상에 불쑥 끼어든 불쾌한 일이기는 했지만 일상을 휘저을 만큼의 영향력은 한 번도 갖지 못했던 것 같다. 담벼락 욕설은 담벼락 욕설의 세계가 있었고 일상은 또 일상의 질서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는 낙서자의 마음을 은밀히 이해하고 공감하는 부분도 있었을 터였다.

 

요즘은 담벼락에서 이런 낙서를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다. 대신 인터넷 게시판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최근, 여성 혐오, 소수자 혐오, 이주민 혐오, 특정 지역민 혐오, 독재자 칭송, 역사 왜곡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온상으로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가 아마 대표적인 곳이 아닐까싶다. 그리고 그 내용은 훨씬 더 심각해져서 특정인들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도를 넘어 표출되고 있기도 하다.

 

일베는 ‘디씨 인사이드(디씨)’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독립해 나온 일종의 파생 사이트이다. 지난 6월 7일, 팟캐스트(podcast) “김종배의 이슈털어주는 남자(이털남)”에 출연한 디씨 운영자 김유식씨는 디씨와 일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원래 ‘일베’는 디씨에서 하루 동안 가장 조회 수가 높은 게시물들을 따로 모아두는 게시판이었다. 이런 게시물들 중 상당수는 조회 수를 높이기 위해 올라온 소위 ‘선정적 제목을 단 음란물’이었다. 그런데 운영자가 사이트 관리 차원에서 음란성 게시물들을 지속적으로 삭제하자 이 게시물들이 삭제되기 전에 미리 다른 곳에다가 퍼다 모아두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렇게 파생되어 생겨난 사이트가 바로 ‘일베’다. 의사이자 컴퓨터 천재라고 알려진 모씨가 주도적으로 만든 사이트라고 알려지기도 한 일베는 이후 약 8명 정도가 함께 운영해 왔고 짧은 시간동안 엄청난 수의 사용자를 모으게 된다.

 

디씨에서 유래된 일베가 갖는 특징 몇 가지를 보면 흥미롭다. 우선, 이런 인터넷 사이트의 특성에 대해 김유식씨는 흔히 생각하게 되는 익명성을 드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맞대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든다. 2007년, 인터넷 실명제가 전면화되면서 사실상 익명성을 완전히 보장받는 것이 한국 내 사이트에서는 이미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대면적 관계라는 특성은 게시글에서 서로 존댓말을 쓰지 않는 문화, 즉, 반말문화로 변천한다. 반말은 이 사이트에서 일종의 규범이 되어 있다. 이로 인해 연령, 성별, 상하 위계 등 대면 대화에서 지켜질 것이 기대되는 대화 규범은 해체되고 대화 상대들 사이에서 특정한 형태의 ‘평등’이 실천되고 있다.

 

방종적 ‘자유’도 또 하나의 특징이다. 높은 조회 수를 얻고 싶어 하는 혹은 주목받고 싶어 하는 이들이 미끼가 될 수 있는 선정적인 제목의 게시글이나 ‘음란’ 동영상물을 올려놓기도 하는데 일베에서는 그 누구도 이에 대한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자기 마음대로 하고 누구도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방종적 ‘자유’가 철저히 실천되고 있는 셈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누구 하나가 특출하게 영웅시되거나 칭송받는 특별한 위치를 누리는 것에 대한 심리적 저항감이 규범처럼 공유되어 있다는 것이다. 튀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을 ‘나대니즘’이라고 보고 철저히 이런 이를 ‘디스’, 즉 비난하고 흉봄으로써 튀는 행위를 배격한다. 오프라인에서 서로 만나는 것을 금기시하는 것도 특정 사용자들끼리의 유대가 생겨나고 이를 통해 특정인이 사이트에 대한 장악력을 갖게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장치다.

 

마지막으로 또한 흥미로운 특징은 이들이 보이는 소위 ‘팩트(fact)’ 숭배주의다. 이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 데에는 일련의 과정이 있어 보인다. 김유식씨에 따르면 인터넷 사업에 대한 정부의 대대적 지원이 시작된 ‘90년대 후반 이후 노무현 대통령 선출과 탄핵반대 운동에 이르기까지 인터넷은 소위 좌파성향 사용자들이 여론세력으로 자리 잡은 경향이 있었다. 이는 인터넷 상에서 우파성향을 대놓고 드러내기가 힘들었던 이들의 불만을 키워왔는데 이처럼 불만에 찬 소위 ‘우익’ 인터넷 사용자들이 소위 ‘진보’세력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한편에 이미 위치해 있었다. 이에 더해 노무현 정부 말기, 실정으로 평가되는 이런저런 일들이 터지자 야당을 지지해 왔던 이들 중에서 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는 이들이 등장했는데 이를 대놓고 드러내지 못하는 경향이 있자 이에 대해 불만과 반발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진보’ 세력에 대해 각을 세우는 또 다른 한편에 등장하게 된다. 여기에 이명박 정권 초기에 터진 ‘광우병 사태’와 ‘촛불’ 정국 하에서 미국산 소고기와 광우병에 대한 소위 ‘팩트’에 근거하지 않은 갑론을박에 대해 일종의 의혹과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이 또 한편에 등장하게 된다. 때마침 대중화되고 있었던 디지털카메라는 소위 ‘인증샷’ 문화를 형성하는 중이었고 이런 분위기는 그동안 인터넷 공간에서 ‘숨죽이며’ 지내오던 ‘불만을 가진’ 인터넷 사용자들의 대거집결과 만나게 된다. ‘광우병 사태’와 ‘촛불’은 곧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인터넷 이용자들의 상당수(김유식씨는 오십퍼센트 정도라고 말한다)가 소위 ‘보수/우파 성향’으로 ‘돌아섰’다고 말해지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일련의 전개과정에서 핵심적인 영향력을 가진 용어로 등장한 것이 바로 ‘팩트’라는 것이다. ‘팩트’ 중심주의는 ‘인증샷’, ‘감성팔이’와 같은 신조어의 등장과 맞닿아있다.

 

디씨에서 유래된 일베의 이러한 문화는 흥미로운 점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반말, 반영웅주의, 팩트 중심주의, 반규제주의 등이 가리키고 있는 어떤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반말을 평등 추구로, 반 영웅주의를 개별 개인의 중요성으로, 팩트 숭배를 이성과 합리성 중심주의로, 규제의 부재를 자유의 실천으로 바꿔 말해 보면 어렵지 않게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개인, 자유, 평등, 이성중심주의(혹은 합리주의)를 핵심가치로 하여 부상한 근대이다.

 

일제 식민지, 6.25 내전, 이후 진행된 급속한 산업화를 겪으며 진행된 한국사회의 근대화는 소위 서구사회의 근대화 과정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띠며 전개되어 왔다. ‘압축적 근대화’ 과정을 겪어야 했던 탓에 제도적, 형식적 차원에서의 근대성과 일상적, 내용적 차원에서의 근대성은 상이한 속도로 서로 어긋나며 한국사회에 자리를 잡았다. 산업화와 경제 개발은 군사독재 하에서 이뤄졌고 공적 관계에서는 사적 관계가 여전히 중요한 자원으로 역할해 왔으며 개인은 출생 후 한 번도 원 가족의 영향력 아래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았던 사회, ‘개인 자아’ 보다는 회사나 가족의 영향력에 묻혀있는 ‘조직 자아’ 혹은 ‘가족 자아’가 의식과 문화를 지배해 온 사회, 소위 근대적인 것과 전근대적 것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한국 사회의 개인들은 개인이지만 조직의 일원으로서, 자유인이지만 조직과 집단에 자유를 담보 잡혀서, 평등하지만 위계에 기민하게 반응해야 하면서, 민주사회이지만 시민이 아니라 영웅을 대접하며, 이성과 합리성을 추구하지만 돈과 권력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사회를 살아왔다.

 

김유식씨의 주장대로 인터넷 이용자들의 반 정도가 ‘보수/우파 성향’으로 실제로 전향을 했고 이들이 실제로 ‘보수/우파 성향’을 내면화 혹은 체화하고 있는지는 찬찬히 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은 디씨나 일베와 같은 곳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의 핵심에 노무현 정부에 대한 엄청난 실망과 피로감이 깔려 있다는 것도 짐작하게 해준다.

 

노무현이 누구인가? 소위 바닥에서부터 스스로를 키워 일어나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던 ‘노짱’, 민주화된 한국사회의 상징적 인물이 아니었던가? 과거를 기반으로 대통령이 되었던 김대중과는 또 다른 인물이었던 ‘보통사람’ 노무현. 그러나 그는 재임기간 내내 그를 선출한 국민들마저도 노심초사 마음을 졸이게 만들었고 실망하게 만들었으며 급기야 퇴임 후 얼마가 지나지 않아 부엉이 바위 위에서 떨어져 최후를 맞았던 사람이다. 노무현의 죽음은 그저 대통령이 되었던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바닥에서부터 스스로를 일으켜 일어나 한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던 근대한국사회의 ‘보통사람’의 비참하고 쓸쓸한 말로라고 봐질 수도 있다.

 

정권은 다시 보수 기득권으로 넘어갔고 동시에 한국사회는 ‘88만원 세대’의 시대를 맞닥뜨리게 된다. ‘88만원 세대’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삼포세대’, 미래를 꿈조차 꾸어볼 수 없는 시대의 이름이다. 그리고 ‘청년 실업’과 ‘남성연대’가 쌍생아처럼 함께 부상하였다. ‘진보’세력이 한때 기득권을 누리게 되었었음에도 세상은 변한 것이 없고 세상을 변화시키겠노라 약속하였던 이는 부엉이 바위 위에서 사라졌다.

 

이후 노무현은 자학적 분노의 아이콘이 되었다. 가장 불안한 이들이 이 불안의 근원을 노무현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를 탄생시킨 시대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를 탄생시킨 세력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노무현에 대한 그토록 극심한 분노를 자제하지 않으면서도 이들은 반말, 반영웅주의, 팩트 중심주의, 반규제주의 등을 통해 평등, 개인, 이성중심주의, 자유 등과 같은 가치를 주장하고 때로는 나름의 역량 안에서 실천하고 있기도 해 보인다.

 

이와 같은 이들의 등장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쩌면 그동안 형식과 내용이 속도를 맞추지 못했던, 제도와 일상이 속도를 맞추지 못했던 한국사회가 이제 그 속도를 맞추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힘겨운 진통의 징후로 봐야 하지는 않을까? 혹은 근대적 가치의 정수인 민주주의의 민주화, 민주화의 결실을 안팎으로 누려보지 못했던 이들이 이제 그것의 진정한 제자리를 찾아달라고 외치는 일종의 아우성, 민주화의 민주화를 외치는 아우성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슬프고 안타깝게도 근대화 과정은 여성, 유색인, 혹은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심지어 근대 산업의 ‘역군’이었던 노동자들에게도 동등하게 일어난 역사가 아니었다. 근대는 처음부터 배제와 차별을 작동시키며 등장했다. 경계를 발명하고 안과 밖을 구분하고 차이진 것들 사이의 위계를 설정하고 정상성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다시 경계가 확정되는 과정, 이로써 처음에는 인위적인 구분에 불과했던 안과 밖이 일종의 자연적인 것으로서의 지위를 얻고 이 사이의 차이가 (더 이상 발명이 아니라) 사실로서의 지위를 얻고, 이렇게 구축된 ‘사실’을 근거로 정상성과 위계가 재강화되어 왔던 과정이었다. 여성, 유색인, 그리고 소수자 등은 안과 밖이라는 경계에서는 밖을, 나와 너의 경계에서는 너를, 위와 아래의 경계에서는 아래를,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는 비정상을 할당받는 위치에 놓여져 왔으며 따라서 안, 나, 위, 정상을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밖, 너(타자), 아래, 비정상 등의 위치에 쉽사리 가해지는 혐오와 차별, 심지어 폭력의 대상이 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근대의 역사는 곧 차별과 폭력의 역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일베충은 근대의 가치를 호출하며 근대화를 그리고 민주화의 민주화를 웅얼거리듯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 초기의 남성들이 그리하였듯이 철저하게 누구보다도 여성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며 그리하고 있다. 여성이 대통령이 된 나라에서 임금노동자 여성들의 70퍼센트는 (저임금) 비정규직에 종사하고 있으며 정규직 남성 평균임금과 비정규직 여성 평균임금은 100 대 40이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는 고용에서의, 승진에서의 차별도 여전하며, 가정, 직장, 길거리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각종 성폭력으로 여전히 피해를 입고 있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저임으로 지불되거나 아예 지불되지도 않는 돌봄 노동과 양육노동, 그리고 인간출산이 여전히 여성들의 책임이자 의무로 떠넘겨지고 있다는 사실에도 눈감고 있다. 일제시대나 한국전쟁 후 가부장의 물적 토대를 잃고 가부장으로서의 권위와 지위까지 잃게 된 남성들이 여성을 비하하고 희생양으로 삼음으로써 남성의 위치, 가부장의 위치를 재건하려고 했던 것처럼 이들도 ‘진상녀’, ‘개똥녀’, ‘택시녀’를 비난하고 혐오하면서 자신의 불안한 위치를 봉합하려 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환향녀’, ‘탕녀’, ‘양공주’를 새로운 언어로, 그러나 구태의연한 내용으로 다시금 호출하고 있다.

 

나는 ‘민주화의 민주화’ 요구에 전적인 지지와 박수를 보낸다. ‘88만원 세대’의 시대가 된 세상에서 더 이상 미래를 향한 부푼 꿈을 꾸지조차 못하게 된 이들끼리, 청년 시절을 실업 상태나 저임금 임시직을 반복하며 살아가게 될 이들끼리, 나이를 먹어갈수록 나아지는 삶이 아니라 더 나빠질 것만 같아 초조하고 불안하기만 한 이들끼리, 학자금 대출금만 떠안은 채 알몸으로 대학 밖으로 내던져진 이들끼리,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늘어나는 것은 빚뿐인 ‘삼포세대’들끼리 서로 바람막이가 되어 민주화의 열매를 다 함께 나눠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전적으로 박수를 보낸다. 그리하여 근대가 가져다 준 개인, 자유, 평등을 철저히 민주화해야한다는 요구에 전적인 동의를 보낸다.

 

그러나 그 욕망과 주장이 차별과 배제와 폭력을 통해 이뤄진다면 그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포함이 또 다른 배제를 통해 이뤄지는 한 민주화의 민주화란 요원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일베충이여, 그대들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 민주화의 민주화라면 제대로 한 번 욕망해보기를, 다른 이에 대한 배제를 통해 자신만은 포함되기를 욕망하는 찌질한 욕망을 함께 극복해 보기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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