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등등인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현대 정념론>의 첫번째 챕터인 1. 정념론의 현대적 의미 입니다.

감정, 정동, 정념의 개념에 대해서 설명하고, 정념론의 역사적 맥락에 대해서 쉽게 설명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뒷부분은 디기 어려운데ㅜㅜ 아직은 이해할 수 있어요! 흐흣*^^*

일본어 세미나팀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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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념론의 현대적 의미

 

1.

 

「정념론」은 오래되고 새로운 문제이다. 먼저 그것은 일반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충동적, 비합리적, 무의식적인 기능이라고 한다. 그리고 정념론은 인간이 감정, 이모션(emotion), 욕망 등을 가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이고,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발달하고, 인공위성과 우주선이 날게 되어도, 또 민주주의나 사회주의에 의해 인간관계가 합리화 된다고 해서 인간은 그것들(감정, 이모션, 욕망 등)의 기능을 잃는다거나, 청산하거나 할 수 없고, 여전히 그것들은 인간의 문제로서 남는다고 하는 의미로 말해진다. ‘인간의 문제로서 남는다’란 그것만이 인간의 문제라는 것은 아니지만, 최후적으로는 회피할 수 없는 문제이며, 또, 회피하거나 무시하거나 업신여기거나 할 때 가차없이 비판을 받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미 아는 것이지만 앞서 말했던 사실은 이따금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보통 널리 ‘감정’이라고 말해지는 이 기능의 문제가, 어떤 시대에도 인간과 함께 있고, 시대와 같이 오래되고, 동시에 새롭다고 해도, 원래 이 문제를 다루는 방법인 「감정」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시대와 함께 변해가고 있다. 옛날부터 「감정」은, 신화, 예술(15)(연극, 노래, 시, 회화 등), 종교, 또 웅변 등의 형태로 토로되었지만, 논의되는 일은 적고, 논의할 수 있는 경우에도, 꺼려해야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형편으로, 가치판단이 앞서고, 확실히 대상화된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들의 상식은, 「이성」을 「감정」과 대립시키지만, 이 대립적인 파악방법은, 이번 경우에도 무관하지 않다. 오랫동안, 「이성」은 인간의 것이기 보다, 인간을 넘어선 「신」의 것이라고 여겨졌는데, 실로 그것 때문에, 「감정」의 문제가 인간의 「감정」의 문제로서, 확실히 파악되는데 이르지 못했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이 인간의 「감정」으로 대상화되기 위해서는, 「이성」의 대립물로서 「감정」도 말하자면 「자신의 내부」로서 파악되기 위해서는, 이성이 확실히 인간의 것이 되는 것, 바꾸어 말하면, 인간적 이성이 주체화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적 이성의 철학자 데카르트와 함께, 근대 초 17세기에 「감정」의 문제가 자각적으로 문제로서 크게 받아들여지고, 여기에 「감정」론의 새로운 발전의 실마리가 열린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 사실이고, 동시에 의미 깊은 사실이다. 데카르트는 그 「이성」을 「자연의 빛」이라고도 불렀지만, 데카르트에 한하지 않고, 예로부터, 이성은 어둠을 비추는 밝은 빛이라 하고 (신의 것으로서 이성은 「은총의 빛」이라고 불렸다), 그것과의 대조에 있어서 「감정」은, 어둡고, 전망을 예측할 수 없는, 맹목적인, 이른바 「어둠의 힘」이라고 되어 있다. 빛은 계속해서 어둠을 비추고,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낸다면, 어둠은 빛이 닿지 않은 장소가 존재하는 것, 카오스의 풍성함과 창조의 근원이 자신에게 속한다고 (16)주장한다. 역사상 반복해서 나타났던 합리주의와 신비주의(비합리주의)와의 대립과 뒤얽힘은, 그러한 것이었고, 그러한 사정은 이후 절대 바뀌지 않는 것이다. 대립과 함께 「뒤얽힘」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에토스(의사) 혹은 파토스(정념)에도 유지되지 않는 합리주의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에토스적인 것, 혹은 파토스적인 것과, 합리주의와 결합, 또는 그 관계야말로 함께 다루어야만 하는 문제가 아니면 안 된다. 분명히 근대의 합리주의문명은 자연에 있어서의 ‘인간 판도의 확대’(F. 베이컨)를 이룬 점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 성공이 눈부시게 빛나면 빛날수록 합리주의 문명 스스로가 하나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은, 세계도 인간도 본질적으로 합리적인 존재라고 점점 더, 믿게 되었다. 인간성의 어두운 악마적인 힘은, 중세 혹은 그 이전의 시대로 쫓겨났다. 그리고 그러한 힘은, 지식의 결여에 의한다든가, 기만적인 왕후나 승려의 교활한 음모 따위로 설명되었다. ……사람들은 근대 민주주의(democracy)의 완성이, 모든 음험한 힘을 지워 없애 버렸다고, 아무런 의혹도 없이 믿어오고 있었다. 이른바 세계는, 근대도시의 밝게 조명된 거리와 같이, 훌륭하고 안전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파시즘이 대두해 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도대체 이와 같은 악으로의 경향이나 힘에로의 갈망, 이런 약자의 권리 무시나 복종에의 동경을 가질 수 있다는 등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자유로부터의 도피』). 이 프롬의 말은, 「문명」사회 속에서의 어두운 충동적인 힘에 의한 반역으로서의 파시즘, 특히, 과학기술을 구사하는 점에 있어서는 최고도로 합리적이었던 나치즘의 도래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프롬이 지적하는 바에서도 있는 것이지만, 파시즘이나 나치즘과 같은 비합리적인 것의 노골적인 표현은, 문명사회임‘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문명사회의 가운데‘에서야말로’ 비로소 보여지는 것이며, 그것은 마치, 빛의 밝기가 증가함에 따라, 대조적으로 빛이 미치지 않는 어둠은 한층 더 어두워지는 것과 닮아 있다. 그래서, 그 어둠은, 문명과 합리주의에의 신뢰가 있으면 있는 만큼, 출현이 의외성을 가지고 나타날 것이다. 문명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나치즘을 심판했던 미소양국이, 매카시즘과 스탈린주의에 휩쓸린 것은, 역사의 속임수라고 할 정도의 일은 아니라고 해도, 합리주의문명의 가운데에는, 비합리적이고 노골적인 힘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어디에도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비합리적이고 노골적인 힘은, 기쁨, 슬픔, 사랑, 증오, 웃음, 분노, 희망, 불안, 의욕, 절망 등, 우리가 인간으로서 갖는 기본적인 여러 「감정」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고, 많은 경우, 그것들의 이른바 비합법적인 동원에 의해서 초래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념론」이라는 것은, 앞에서와 같이 일반적인 「감정」론의 의미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에서는 「감정」을 좁은 의미에서의 감정과, 정동(정서, emotion) 및 정념(정열, passion)으로 구별하고, 그 세 가지를 격렬함의 차이로서 파악하고 있다. 즉, 정동은, 그 영향이 뚜렷이 신체에 나타날 정도로 강렬한 일시적인 감정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갖추어진 (18)본래의 경향이 움직일 수 없게 될 때에 생겨나는 것으로 여겨진다. 나아가 행동이 한층 강하게 속박되고, 자연의 흐름이 막히고 인간이 고뇌에 처해지게 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켜 정념이라고 부른다. (島崎敏樹, 『감정의 세계』) 결국은 이것과 연결되지만, 이 감정, 정동, 정념의 전체를 아우르는 영역을 「정념론」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었던 것은 데카르트였다. 근대의 「감정」(넓은 의미의) 론 에 있어 데카르트이 위치에 대해서는 앞서 말했지만, 그 「감정」론이 특히 「정념론」으로써 다루어졌던 것은 단순히 문자 혹은 용어상의 자의성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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