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대안-연구장’을 위한 구상>에서 발표될 글의 두 번째 소개입니다. 


 

 

 


<스피커는 광장에서 촛불이 꺼지고 나서 들려온다>

(<문학3>, 2017년 2호 게재)

 


신현아



 

 

 

 

 

 

 

 

 

 

 

 

성숙한 시민들이 모여 민주주의를 이뤄낸 광장의 이야기는 언제나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얼마나 창의적인 집회 문화를 창조했는지, 얼마나 평화로웠는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됩니다. 그런 광장의 서사가 반복될 때 기입되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고, 설명이 되지 않는 현장이 있습니다. 어쩌면 광장이라는 거대한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어떤 이야기와 현장은 착취당한 것이 아닐까를 말해보고자 합니다. 가덕도의 투쟁의 역사는 왜 어리석게 속아서 미안한 이야기로만 재생산 되어야만 하는지, 왜 광화문 광장이 막을 내리고 누군가는 광화문 광고탑의 고공으로 올라가야만 했는지, 이를 지역에 축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대의와 성명서로 증명되어야만 하는 중앙의 연대가 아닌, 우리 동네에서 누군가 싸우고 있다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투쟁 이웃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로컬-대안-연구장’을 위한 구상>에서 발표될 글을 미리 조금씩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김대성 선생님 글로 시작합니다. 

노동자의 글쓰기를 베끼고 엮으며 함께 잇대어 쓰는 '합창'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새로운 계보를 만들고자 하는 글입니다.

 


<역사적 합창으로서의 노동자 글쓰기: 석정남과 신경숙> 
(<문화/과학>,2017.여름호 게재)

 


김대성

 


 

이 글은 ‘노동자가 쓴 글’과 ‘노동자의 경험을 쓴 글’을 문학장이 어떤 방식으로 분할 및 배치해왔는지 비판적으로 추적한다. 거의 비슷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석정남의 <공장의 불빛>(일월서각, 1984)과 신경숙의 <외딴 방>(문학동네, 1995)이 왜 단 한번도 함께 거론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 질문하되 이 둘을 맞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나란히 놓아두고자 한 것은 노동자들의 글쓰기가 ‘자기만의 방’에서 독립적인 방식으로 쓰인 것이라기보단 서로가 서로에게 기댐으로써 긴 역사를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석정남과 신경숙의 작품을 상호 비교함으로써 노동자 글쓰기에 내재되어 있는 ‘역사적인 합창’의 양태를 드러내고 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연구모임 아프꼼 월례 연구/발표회

  <‘로컬-대안-연구장’을 위한 구상>



연구모임 <아프꼼(aff-com)>에서 연구 활동을 재개하며 매달 월례 연구/발표회를 개최합니다.


올해 2월 발표에서도 많은 분들이 참석해주시어 즐겁게 토론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앞으로는 이 연구발표회를 시작으로 매 달 개최하여, 국내외의 다양한 연구자들과 만나려고 합니다. 

누구나 신청하여 발표하고 토론하며, 자유로운 연구 교류의 장을 열어보려 합니다.


이후 저작 서평회와 강연회도 개최할 계획입니다.


이번 월례 연구/발표회는 <‘로컬-대안-연구장’을 위한 구상>을 주제로 하여 

아프꼼 멤버들이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최근 발표한 글을 통해 함께 이야기를 이어나가보자 합니다.


7월 7일 오후 2시부터 오후 6시까지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국제관 B5-0409에서 개최됩니다.



‘로컬-대안-연구장’을 위한 구상

2017. 07. 07. PM02~06

동아대 부민캠 국제관 B5-0409

1발표

14:20~15:00

<스피커는 광장에서 촛불이 꺼지고 나서 들려온다>(<문학3>, 2017.2호 게재)

신현아

2발표

15:00~15:40

<역사적 합창으로서의 노동자 글쓰기: 석정남과 신경숙> (<문화/과학>2017.여름호 게재)

김대성

휴식시간

15:40~16:00

3발표

16:00~16:40

<증강 현실적 신체를 기반으로 한 대안기념 정치 구상: 애도 주체와 현실의 증강, 그리고 ‘완서학’의 원천>

(<여성문학연구>, 2017. 40호 게재)

권명아

4발표

16:40~17:20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문화적 재현: 해방 이후부터 50년대를 중심으로> (<문학들>,2017, 여름호 게재)

장수희

종합토론

17:20~18:00


본격 정리하는 후기

 

신현아

 

얼마 전 10월 11일,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주최 연속기획특강 제 14강으로 권명아 선생님의 서평회 <골치덩어리, 부적절한 정념 그리고 정동>이 있었습니다.

특히 이번 서평회에서는 최근에 출간된 도서인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에 관한 것 뿐 아니라, <역사적 파시즘>과 곧 나올 저작인 <음란과 혁명> 등 <외로움>에 이어지고 닿아있는 그간의 연구에 대한 흐름과 고민 등을 나누는 자리이기도 하였습니다. <골치덩어리, 부적절한 정념 그리고 정동>이라는 강연 제목 또한 이전의 연구에서부터 이어지는 지점들을 짚어주는 단어로 엮여 있어, 이 자리의 의미를 엿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하의 후기는 제가 기억나는 것을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권명아 선생님의 발표 내용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 날 정말 빠씨옹이 넘치는 열강을 해주셨습니다.

 

먼저 '골치덩어리'는 <역사적 파시즘>에서 약 30p가량으로 비교적 짧게(?) 정리되었던 개념이지만, 이 단상이 파시즘 연구에서 이후로 넘어가는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골치덩어리'라는 용어는 실제로 당시 총독부에서 다스려 지지 않는 인간들을 가리켜 썼던 단어라고 합니다. 당시 일본 제국에서는 식민지도 늘고, 이것 저것 사업도 많이 벌리고 하여 또 부지런하게 잘 되고 있나 안되고 있나 설문조사도 하고 통계도 내고 보고도 하고 분석도 하고 전략도 짜고 합니다. (일본 제국이든, 대영 제국이든, 제3제국이든 정말 제국은 미칠듯한 부지런함과 관료주의가 종특인듯) 그래서 아 이 사업은 참 잘되어서 호응이 좋구나, 아이고 여기에 아직도 저항세력이 있구나, 등등도 진단하고 욱일승천하는 제국의 일로를 가봅시다! 그럽시다!......라고 하려고 했는데..... 

 

.............별 응답이 없어......

 

당시 총독부에서 했던 여러 통계 등에서 다른 수치들은 시대나 상황에 따라 이러저러한 변동을 겪지만 거의 유일하게 큰 변동이 없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것은 바로 무응답/무관심이라는 부분이었습니다. 물론 뚜렷한 저항의 노력이 있어 왔고 이는 가시적인 자료 등에서도 드러나는 바입니다만, 이러한 무응답/무관심과 같이 어떤 특정한 의미로 규정되지도 포착되지 않기에 체계적인 자료로 남아있지도 않으며, '난센스적 일탈행위'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골칫덩어리들, 난센스적 일탈행위들은 커다란 틈새로 여전히 남아 '통제 체제의 일사불란한 관철을 막는 핵심적인 저지선'을 형성하지 않았는지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커다란 틈새'는 엘리트층의 단일한 적대구조와 같은 생존투쟁의 영역보다도 비엘리트층의 일상적이고 생활적인 영역에서 주로 나타나기에, 의미 없는 것이나 저항에 이르지 못한 개인적 불만 표출의 차원으로 간주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사료로 나타나지 않는', '저항으로 규정되지 않는', '의미 없어 보이는', '통일되지 않는'ㅡ '난센스', '골치덩어리'의 문제들은 이후 '풍기문란'에 대한 연구로 이어지게 됩니다. '풍기문란'은 '풍기'라는 규정되기 어려운 것을 '문란'이라는 애매한 법제을 통하여 통제하고자 했던 시도이기도 합니다. 풍기문란에 대한 연구는 일반적 '저항'의 자료들 속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골치덩어리들'을, 이들을 '풍기문란'이라고 규정하는 자들의 그 규정을 통하여 거꾸로 다시 찾아보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거꾸로 다시 되짚는 과정 속에서 '다스릴 수 없는 자들'과 '부적절한 정념'으로 판단되었던 것들은 또 다른 의미를 갖고 떠오르게 됩니다.

(이건 제 생각으로 예를 들자면, 최근의 아동청소년보호법=약칭 아청법도 풍기문란 법규와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동성폭력이 수면 위로 자주 떠올랐던 최근, 아청법이 생겨났습니다. 이 아청법의 주요 단속 기준은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음란물에 관한 것인데요, 이 '음란함'의 기준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영상 또는 만화 (소설텍스트는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의 음란물에서 아동이나 청소년이 등장하거나 교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아동이나 청소년으로 인식된다면 아청법에 위반된다는 것인데요, 기준이 애매합니다. 성인이 교복을 입은 음란물은 문제가 되고, 설정은 미성년자이지만 성인처럼 생기고 성인처럼 보이는 만화캐릭터가 음란한 행위를 하는 동인지는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특히 동인계에서는 아청법 제정을 두고, "실제 여성이 성추행을 당하면 벌금 50만원에 그치는데, 가공의 만화캐릭터가 음란한 것은 왜 최대 2000만원이나 벌금을 내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거나, "왜 아동 보호같은 것에는 방점을 두지 않고, 이런 가상의 음란물을 단속하는 데에 더 방점을 두느냐"하고 들끓고 있습니다. 결국은 아동청소년보호법이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보호'가 아니라,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성인들의 '마음'을 단속하고 규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풍기문란'은 또 다른 바람이 됩니다. <서화>의 세 가지 바람, '풍기', 또는 '풍속'이라는 세속의 바람, 그 세속의 바람이 내 안에 전달될 때 뜨겁게 느껴지는 열정의 바람, 그리고 세속의 바람을 내 마음의 바람으로 옮겨다 주는 정동의 바람입니다. 정동은 이처럼 '풍기문란'의 '부적절한 것'한 것이자 붙잡히지 않는 마음-정념과 같은 것이 번져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법의 힘(면서기 김원준), 전통적 공동체의 힘(진흥회장 정주사), 저항의 힘(사회주의 전위 정광조)들이 바람을 자기 편으로 불게 하고자 움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떻게도 전유될 수 있는 동시에 어떻게 전유될 지 알 수 없는 바람입니다. 그러니, '골치덩어리들', 정념, 정동을 "이것이 대안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또는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기도 하지요.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역시도 어떠한 대안이나 새로운 힘을 내세우기 보다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나 '삶'이 어떠한 구조 속에 포획되는 것,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마음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인 구조 속에서 불안, 우울함, 외로움 등으로 전이되어가는 것 그 자체를 살펴보고자 했다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뭔가 우정이나 관계의 손길을 내미시는 제스쳐를 열정적으로 보여주고 계셨는데 멀어서 안보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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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과 답변

 

이하 서평회장에서 나왔던 질문과 답변을 정리하였습니다.

간단히 메모한 것을 재구성한 것이라 사실과 다른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

 

문: '부적절한 정념'으로 치부되어 버리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의 의미를 포착하고 정치성을 찾고자 하는 시도와 함께, '적절한 정념'이 있다면 그것에 대한 것은 어떻게 생각될 수 있을까요?

답: '적절한 정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마도 '환희'나 '기쁨'과 같이 긍정적인 힘을 끌어내는 것으로 말해지는 정념들을 말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한편으로 여기서 문제는 '부적절'과 '적절'이라는 규정과 기준 그 자체에 있습니다. 실은 '부적절한 정념'이라는 규정의 안은 규정의 의미가 없는 텅 빈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나누는 것은 법의 개념입니다. 적절한 존재와 부적절한 존재에 대한 것을 심문하는 것이지요. 이 심판에 따라 부적절한 것이 적절한 것이 되기도 하고, 적절한 것이 부적절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텅 빈 것에 대해 무엇이 정확히 적절하고 부적절한지를 나누는 것은 무규정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이런 것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무규정적인 질서들이 증식하게 됩니다. 이런 무규정적 질서의 증식을 아감벤 역시도 파시즘적 징후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기준과 규정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 정동의 힘들이 어떤 식으로 묶여질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들뢰즈는 이러한 정동적 힘을 '잠재성'으로 이야기하지만, 이 잠재성이 어떻게 바깥으로 드러나거나 함께 묶여서 어떠한 다른 것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이 때 '묶인다'라고 하는 것은 5.18과 같은 '사건'과 같은 것이라고도 생각하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답: 저는 그러한 '골치덩어리들', '풍기문란자들', '정념'과 같은 것들이 '조직'이나 명시적인 '저항'의 행동과 같은 것들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잠재로만 묻혀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50%에 달하는 무관심층'과 같은 경우에도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들을 갖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파시즘 체제의 거대한 걸림돌로 지속적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어떤 체제라도 모든 일상을 장악할 수는 없다"는 말이 있지만, 나치즘은 그것을 실제로 하려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체제는 결코 장악할 수 없는 부분을 남기게 되고, 그것은 바로 일상의 수많은 틈새들에서 튀어나오는 걸림돌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무관심'이나 '걸림돌'과 같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기존의 저항을 무화시키려 하는 거나 한 편이 더 의미가 있었다는 식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료에 명확히 남아있는 것들은 이미 '저항'이라는 이름을 얻어 우리들의 시야에 존재하게 되었지만, 그것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그것과 다른 것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다른 것'은 '저항'이나 '봉기'와 같은 기존의 언어로 전달이 되지 않는 새로운 세계이기 때문에 다른 방식과 다른 의미를 통해 접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식민지기의 문서로만 접근한다면 이 시기는 그야말로 암흑기입니다. 저항은 탄압당하고, 새로운 힘은 나올 구석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저항'으로 명시되는 자료들이 아니라, 당시의 범죄기록과 같은 것을 보면 이런 '골치덩어리들'에 대한 법규들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들여다보면, 이 골치덩어리들은 총독부와 경찰이 끝까지 연구하고 다가가려고 했지만 실패했던 것으로서 끊임없이 출현합니다. 저는 이러한 접근을 통하여 '암흑'의 시대가 아니라 다른 존재들의 다른 이야기들을 발견하고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 선생님에 앞서 여기서 강연을 해주신 오카 마리 선생님의 강연에서 다음과 같은 영화를 소개받았습니다. 매기라는 방탕한(?) 여자주인공은 정부에 의해 '엄마로서 부적절하다'고 판단되어 아이를 뺏기게 됩니다. 그리고 매기는 이후 '엄마'라는 것을 승인받기 위해 계속하여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을 다시 먹습니다. 선생님께서 <서화>의 돌쇠가 '골치덩어리'인 동시에 어떤 역능을 가졌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이 '매기'라는 여성이 법에 의해 적절성을 심판받고 이후 과잉된, 더욱 부적절한 행동으로 자신을 인정하고자 하는 맥락이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답: 감사합니다. 저에게도 반드시 참고가 될 만한 영화인 것 같습니다. '저항'이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적절성의 패턴이라면 이 정념들은 과잉되고 부적절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과잉되게 대항하는 매커니즘은 적절함을 요구하면 오히려 부적절함으로, 과잉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서화>에서는 초반에 애기장수설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돌쇠가 애기장수에 빗대어져 있는 것인데요, 애기장수는 한편으로는 이 세계에서는 통용이 되지 않기 때문에 없어져야 하는 힘입니다. 하지만 이기영은 <서화>에서 이 '돌쇠'가 애기장수처럼 없어질지, 또는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그리고 있지 않습니다. 정작 이 힘이 어디로 갈지는 모르고 나오지 않는 것이지요. 이기영 역시도 <서화>의 이러한 '바람'과 힘에 대해 기미운동 전의 조선의 모습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들불처럼 어떻게 번질지 알 수 없는 힘인 것이지요.

그 영화에 대해서 또 다른 면에서 보자면 <풍기문란>은 언제나 성에 관한 것으로 인식되어지지만, 그것이 본질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겠습니다. 풍기문란은 실은 '생산성'에 대한 관리입니다. 떠돌아다니는 노동자, 농땡이부리는 학생들처럼 '비생산적'인 것들을 생산적인 것으로 끊임없이 규제하기 위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 생산성에 대한 관리는 여성에게 있어서 특히 자궁의 생산성에 대한 관리로 이어집니다. 피흘리는 자궁을 아이를 생산하는 적절한 자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도박과 간음을 일삼는 돌쇠와 아이를 낳아서 먹어버리는 자궁/엄마에게는 아주 다른 듯 하지만 같은 의미의 과잉이 존재합니다.

 

 

문: 선생님의 작업은 상당한 기간의 역사작업을 통하여 현재에 대한 탐색까지로 이어져왔습니다. 선생님의 역사작업 방법론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답: 이잡듯이한달까요... (웃음) 요새는 이런 연구들이 꽤 나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검열, 풍속괴란, 풍기문란, 치안과 같은 것들에 대한 것이지요. 그런데 '검열'이라고 하면 치안에 관한 자료가 대부분이고, 연구 또한 사상 검열에 관한 것이 주가 되고 있습니다. 문서나 도화에 대한 검열같은 것인데, 통계적으로도 이러한 검열의 문제가 많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연구되는 '사상검열'이라고 하면, 사상검열에 해당되는 주체들은 대부분 사상서를 쓸 수 있는 사람인 엘리트층에 한정이 됩니다. 실제로 총독부에서도 이잡듯이 검열을 하여, 조선의 출판시장을 전부 통제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당시의 민중들이 실제로 제일 많이 보는 것은 춘향전이나 심청전과 같은 것이었고, 당시 총독부에서도 이를 인지하여 구시대적인 것을 단속하고자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후에는 족보, 춘향전, 심청전과 같은 것들이 단속 대상이 되지만, 문제는 이러한 책들은 근대적 출판시스템으로 유통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 많이 모이는 장터에서 팔고 사라져버리는 식으로 전해졌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검열과 통제는 현장을 덮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되고, 이것은 기록에 잘 남지 않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이처럼 일상에서 일어나는 검열, 풍기문란 통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면, 자료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시야를 바꾸어 보면, 당시 새로 추가되었던 법률에 관한 자료 등에서 장터 단속에 대한 법을 계속 추가하는 것에서 풍기문란 단속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전혀 관계가 없어보이는 텍스트들, 범죄기록, 법전과 같은 것을 왜 보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일반적인 자료와 방법론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것들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다른 문법과 시야를 통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면에서 말씀을 드리자면,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과 같은 경우는 역사작업과는 좀 다른 방법론으로 쓰여진 책입니다. 최근 이 책처럼 역사작업과는 다른 방식의 글쓰기나 작업에 더 의욕을 가지게 된 것은 부산에 오게 된 것이 큰 계기로 작용하였습니다. 저는 항상 지배적인 연구방법과 다른 연구방법론으로 접근하는 그 투쟁에 의미를 두었고, 그래서 역사작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산에 내려온 이후 초반에는 역사자료에 대한 공동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 와서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이러한 역사작업 조차도 실은 이미 학문장의 성과가 많이 쌓여있는 매커니즘 속에서 가능한 것이라는 겁니다. 즉 어느 팀에서는 이 자료를 연구하고, 또 다른 팀에서는 그와 다른 관점에서 또 다른 자료에 접근하고 있으며, 또 어떤 팀에서는 어떤 자료를 새로이 입수하였다는 것과 같이, 연구에 대한 지평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주류'의 방법론이 있는 것이고 또 그것과 싸우는 또다른 방법론 역시도 그것에 비추어 다른 그림을 그려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산에는 이러한 거대한 협업과 분업의 구조나 자료가 거의 없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작업을 계속 고수하는 것은 이전의 상황과 관련된 것이지 지역의 연구자들과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대에 바로바로 개입할 수 있는, 게릴라전 식의 글쓰기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연구작업이나 결과물을 내는 패러다임이 하나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운이 좋다고도 할까요...? 연구자들은 연구를 하다보면 관성이 생기지요. 어쩐지 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 아는 것만 같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만 같고......실은 그게 아니겠지만요. 그 관성의 갱신은 결국 새로운 현실의 압박으로 생기는 것이잖아요. 제가 여태까지 놓여져있던 곳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 연구자로서, 연구의 동력, 열정은 외부로부터 온다고 봅니다. 모르는 대상이 있으니 달려들게 되고, 궁금증이 생겨나고...... 그래서 삶의 반경이나 운명과 같은 개념들에 대한 단서들이 있었지만 구체적인 실감과 말을 얻게 된 것은 부산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서였습니다.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의 4장에 실린 표제작(?)의 서두에는 다문화강사 K씨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실은 부산에 와서 만났던 이 분에 대한 짧은 이야기에 이 책의 모든 것이 녹아 있습니다. 그리고 풍기문란의 대표격이라 할 장정일에 대한 글 역시도 이전에는 제가 참 많이 글을 쓰고 접근하여 왔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도 지역의 아이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다시 보니,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하는, 그러한 구조와 지역이라는 위치와 성장해나가는 삶의 반경이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죠.

 

 

 

 

 

 

2012년 9월 20일 목요일, [문화/과학] 북클럽 논쟁 두번째 이야기가 홍대 클럽 바 "Sha"에서 이루어졌다.

권명아 님의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에 대한 논쟁으로, 조형근(문화과학 편집위원) 님의 사회와 김홍중(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님의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원래는 Sha의 주인장이자 허클베리핀의 리더인 이기웅 님의 공연도 함께 이루어질 계획이었으나, 한중 수교 20년 공연 일정이 변경되는 바람에 일찍 중국으로 출국하게 되어 부득이하게 취소되었다. 조금 아쉬웠지만 한편으로는 이 덕분에(?) 책에 대한 논쟁이 더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 날 그 현장 속으로 가보자.

 

 

    

       <홍대 클럽 바 "Sha"의 내부는 공연사진과 조명 등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아프꼼 총서의 출판사인 갈무리의 오정민 선생님께서도 일찍 오셔서 부스를 뚝딱 만드셨다.>

 

 

 

대상의 뒤를 계속 쫓아가야지만 되는 어떤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기본적으로는 파시즘과 젠더 정치에 대해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 과정 속에서 정념이라는 다소

고전적인 문제와 만나게 되었다. 또한 고민하는 대상을 여러가지 방식의 해석 언어들을 가지고

고민하면서 현재, 정동이라는 이론과도 조우하게 되었다. (권명아 교수)

 

  권명아 선생님의 발화로부터 시작된 북클럽 논쟁에서 함께 고민해 볼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위의 인용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권명아 선생님은 연구과정에서 만나게 된 문제들과 고민 지점들, 그것의 이행 과정에서 만나게 된 정동 이론과의 조우에 대한 맥락을 이야기로 풀어가면서 본인의 연구 궤적들을 밝혀 나갔다. 권명아 선생님은 역사적 자료들을 읽어나가면서 기존의 학문적인 방법틀에서는 사유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 자료들 속에서 천편일률적인 말들과는 다른 무언가의 흔적들을 발견하여 그것을 계속해서 쫓아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것을 줄여 말하면 "부적절함"이나 "정념"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님은 이러한 "부적절함"이나 "부적절한 정념의 담지자(풍기문란)"들을 희미한 불빛으로 삼아 쫓아오면서 여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물론 아직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들 덕분에/탓에 한계를 내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연구가 지속될 수 있는 동력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지금에 이르게 된 연구의 이행 과정을 차근히 설명해 주셨고, 이를 토대로 하여 김홍중 선생님의 토론이 계속되었다.

 

 

 

     

                     <북클럽 진행중, 왼쪽부터 조형근, 권명아, 김홍중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우리 시대의 가장 대표적 정동을 외로움을 보고 계신듯 합니다.

책의 여러부분에서 외로움은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외로움의 자리에는 동일자와 타자의 문제,

소통의 문제, 권리, 권력, 통치성과 같은 문제들이 뒤엉켜있다고 말씀하셨고 이것이 외로움이

정치적인 것의 범주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셨다. 외로운 주체들끼리 우정, 환대 사랑 응답의 관계,

반려 관계를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외로움 한 단어로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의 감정의 단면을 잘 읽어내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논리, 분위기 속에서 생각해 보면

한국 사회는 개인들의 외로움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정동의 역사를 써왔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분노나 정의감, 파괴적 열정이 아니라 외로움이 우리시대의 대표적인 정동이라면 선생님의 표현대로

파토스에서 아파지로의 전환일 것이고, 정치의 입장에서는 정치의 원동력이 외로움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설득력 있지만 한편으로는 씁씁한 생각이 든다. 다만 좀 아쉬운 것은 계급, 세대, 젠더의

차이들이 다채롭게 들어갔으면, 다시 말해 외로움을 비판해줬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외로움들의 차이를 짚어줬다면 외로움으로 진화해간 우리 시대의 정동이, 현재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어디로 가야될지에 대한 좌표가 그려지지 않았을까 한다. (김홍중 교수)

 

  권명아 선생님의 1차 발언 이후, 김홍중 선생님께서는 사회학자로서의 입장(?)으로부터 도출된 몇 가지 의문점을 가지고 토론에 응해주셨다. <<마음의 사회학>>이라는 저서를 통해 한국사회를 진정성의 체제에서 포스트 진정성의 체제로의 전환이라는 문맥을 가지고 문학, 문화 텍스트들을 종횡무진하며 날카롭게 분석한 김홍중 선생님께서는 몇 가지 심도 깊은 논점들을 제기해 주셨다. 사회학이 탐구해야 할 마음의 영역, 마음의 레짐(regime)을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과 함께 고찰해 본다면, 특히 한국사회에서의 대표적인 정동(affect)이 권명아 선생님의 분석대로 외로움이 아니었을까 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이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도 짚어주셨으면 하는 아쉬움까지도 표해주셨다.       

  다시금 바톤을 이어 받은 권명아 선생님께서는 외로움이 왜 문제적인가, 그리고 책을 읽은 독자들이 감지한 외로움의 다양한 스펙트럼들, 일제 식민지기를 통한 파시즘체제의 경험, 한국전쟁(전후)에서 나타난 외로움 등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말해주셨다. 그리고 김홍중 선생님께서 논의해 주신 외로움이 나아가야할 좌표, 다시 말해 전망(perspective)을 제시하는 것을 왜 시도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권명아 선생님의 응답이 계속되었다. 권명아 선생님께서는 이 글들을 쓰면서 경계해야 할 몇 가지 지점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고백하셨다. 그것은 "지도를 그리지 말자, 예측하지 말자, 정동을 대안으로 제시하지 말자, 정동을 전유하지 않는 방식으로 글을 쓰자" 등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그들 "옆에서 써 나가는 방식"을 택하게 된 점에 대해서, 그리고 이것이 학문장에서 비판받을 것이라는 점 역시 염두에 두었던 분석 방식에 대해서도 진솔하게 말해주셨다. 이러한 부분은 이 글의 첫번째 인용("대상의 뒤를 쫓아가는 방식")과도 연결된다.

  이외에도 김홍중 선생님께서 꼼꼼하게 읽고 제기해준 또 다른 논점들에 대한 응답과 재-질의, 코멘트, 참석자 분들과의 토론 등의 시간도 이어졌다.

    

 

 

 

                              <북클럽 논쟁의 현장과 그 속에 있었던 많은 참석자 분들>

 

 

여러 가지 제안이 오고간 문화과학 북클럽 논쟁 두 번째 이야기.

이 자리를 빌어 권명아 선생님께서는 김홍중 선생님의 토론과 참석자들의 코멘트 등이, 앞으로 해 나갈 작업에 대한 자극과 격려가 되었다고 말하셨다. 그리고 현재까지의 고민을 확인하는 작업과 그 이행의 결과들을 나누는 자리로부터 출발한 이번 북클럽이, 한편으로는 그것으로부터 본격적으로 해 나가야할 이후의 연구들에서의 중요한 화두들과 숙제들을 받은 자리가 아니었을까 하면서, 감사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더 자세한 북클럽의 생생한 현장은 영상을 통해서도 확인 가능합니다. 아래 링크를 참조해 주세요.)

http://www.aff-com.net/183

 

 

 

   

  

 

 

 

 

 

 

 

aff-com 총서는 정동공동체에 관한 이론과 실천을 문제틀로 하여 연구모임 aff-com에서 기획하고 있다. ‘affect’‘commune’을 연결하여 재발명하고 있는 연구모임 aff-com 역량을 측정하는 현실적, 권력적, 제도적 측정술을 거부하고 우리라는 이름 속에 이미 역량이 내포되어 있다는 믿음을 갖고, 그 역량을 입증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그간 <Lo-culture>라는 이름으로 서평회, 국제학술문화예술 교류, 콜로키움, 대중강좌, 웹진 발간 등 다양한 활동을 해왔으며 전지구적 다중 네트워크의 구축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독립 출판사 갈무리와 연대하여 aff-com 총서를 기획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한 권의 책은 연대의 기록이기도 하다. ‘서평회라는 형식을 통해 이 책을 읽고자 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무수히 겹쳐져 있는 만남과 연대, 갈등과 실패의 기록을 만나게 될 것이다. 서평회라는 장()은 완결되거나 완료된 작업에 대한 논평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쓰여지지 않는 장()을 새롭게 쓰는 만남과 연대의 장소()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aff-com 총서의 발간을 계기로 아카데미 밖에서 혹은 그 '사이'에서 인문학 실험(운동)을 해온 그간의 경험들을 공유하고 아울러 각각의 모임들이 연대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이 서평회를 통해 곳곳에 흩어져 있는 많은 결속체들이 '깊이''무게'를 가질 수 있는 계기로 연결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이번 서평회는 서울과 부산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그간 권명아가 이끌어온 연구모임은 부산이라는 도시를 거점으로 하여 서울 및 일본 등 다른 지역과의 네트워킹을 활발히 진행해왔으며 인문학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들과도 작업을 진행해온 바 있다. aff-com 총서 출간을 계기로 진행하는 본 서평회는 기왕에 진행해왔던 작업과 연속되면서 동시에 또 다른 도전과 실험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진행되는 서평회에서는 <aff-com>을 이끌고 있는 권명아와 <다중지성의 정원> 대표 조정환, 서발턴과 타자의 목소리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김원을 초대하여 aff-com 총서 1권에 대한 생산적인 비평과 더불어 각자가 수행해온 인문공동체 운동에 대한 그간의 작업들에 대해 응하고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더불어 부산에서는 수년간 진행되어온 연구모임의 궤적을 더듬어보면서 지역에서의 인문, 생활공동체들과의 만남과 연대에 관한 논의가 권명아의 저작에 대한 서평과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 그간 오랜 시간 공동체 운동을 수행해온 이론가 및 활동가들과 함께 권명아의 저작에 대한 비평과 더불어 인문적 공동체 활동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본다. 아울러 연구모임 aff-com의 아트워크와 담당하고 있는 송진희와 소규모 출판 운동을 하고 있는 <그린그림>의 콜라보레이션도 진행될 예정이다.

 

 

 

 

 

 

 

다지원에서 이루워졌던 서평회 현장 입니다!

 

 

 

 

 

 

다중지성의 정원 입구에 세워진 팻말! 

 

 본격 서평회 전, 발제문을 검토하고 계신 권명아 선생님

 

 

 

 

 

 

 

 

 

 

 

 

 

 

 

 

 

  서평회 2부 사회를 맡아주신 아프-꼼의 양순주 선생님.

 

 

토론의 틈을 비짚고, 잠시 아프-꼼 소개중.

 

다년간의 활동이 기록된 자료집과, 영상등을 볼수있도록 한쪽에 마련된 부스

 

 

 

 

 

 

 

 

 

 

 

 

 

대중강좌 식순

제1부: 박홍규 선생님 소개및 강연

제2부: 질의 및 전체 토론

제3부: 서평 발표 및 코멘트

 

 

 

 

 

 

대중강좌 다과를 준비해주신 가이씨와 자료집과 테이블 세팅중인 장수희선생님과 선우씨.

 

 

 

 

음향체크중인 현아씨와 김대성 선생님

 

 

 

 

오늘 대중강좌 내용을 체크 중인 선우씨

 

 

 

 

짜잔 ~~ 하고 나타나신 박홍규 선생님의 모습

 

 

 

 

하나 둘씩 모이는 사람들. 방명록 기재 모습

 

 

 

 

박홍규 선생님의 강연시작. 이날의 강연은 선생님 좌석과 마이크를 따로 마련해 두었지만, 편하고 자연스럽게

박홍규 선생님의 스타~일로 진행되었습니다.

 

 

 

 

경청하는 사람들.

 

 

 

 

 

 

열정적으로 강연해주시는 박홍규 선생님의 모습

 

 

 

 

2부 질의및 전체 토론 사회를 맡은 현아씨.

 

 

 

 

플로워 질문시간

 

 

 

 

 

선우

 

 

본 자료들은 Lo-culture서평회 <정념과 삶의 거처 - 역사, 현실 이론>의 자료로 쓰였던 권명아선생님의 논문들입니다. 권명아 선생님의 최근 연구들의 맥락을 이해하고 지평을 함께 공유하기위해 본 자료들을 게재합니다.


1.「풍기문란과 정념의 어드레스」, 분가쿠, 岩波書店, 일본, 2010년 3-4월호 (한국어 원본)

2. 「소년범, 작가, 음란범-J의 탄생과 종말」, 냉전체제와 검열 심포지엄 발표문

3. 「죽음과 생존을 묻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 당비의 생각 3호, 2009

4. 「맨몸의 숭고와 '비판적 삶'의 종말」, <<작가세계>> 82호, 2009년 가을호

5. 「제국의 판타지와 게토 사이에서 타협하며 살기」, <<황해문화>>, 2010년 여름호

6. 「파시즘과 '해방의 정치'의 일레마」, <<문화과학>>, 2009년 여름호

7. 「죽음과의 입맞춤; 혁명과 간통, 사랑과 소유권」, <<문학과 사회>>, 2010년 여름호


권명아 선생님의 풍기문란 작업과 그 연장에서 <정념과 주체성의 정치>를 역사 작업과 당대적인 문화비판적 작업의 두 측면에서 진행했던 글입니다.


1번과 2번은 풍기문란과 관련한 역사적 맥락과 그 고고학적 탐색의 결과들을 정리한 글입니다. 주로 '부정적 정념과 그 담지자'들에 대한 정체성 정치의 역사를 탐색하고 있습니다. 주체성의 문제를 정념을 둘러싼 투쟁, 혹은 정념의 정당성을 둘러싼 투쟁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본 작업들입니다. 그리고 이하의 글들은 이와 같은 역사 작업을 토대로 당대에 대한 문화비판적인 개입의 차원에서 시도한 글들입니다. 7번은 '4월혁명'을 '사랑과 열정'에 대한 소유권 투쟁이라는 차원에서 다시 검토한 글입니다. 6번은 '불안'의 정념을 키워드로 파시즘의 역사와 이론을 검토하고, 현재적 상황을 검토한 글입니다. 특히 '생존의 정치화'가 '불안의 정념을 파시즘적으로 전유'하는 방식을 검토한 작업니다.

3,4,5,6번 글들은 오늘날의 시대정신을 '불안, 외로움, 슬픔'의 정념/정동을 통해서 고찰할 글들입니다. 5는 '외로움'의 정동을 정치적인 것과 새로운 어소시에이션(이행의 기제/반려/연합의 복합적 차원에서)의 맥락에서 살펴보았습니다.

3,4,는 노무현 전대통령 자살, 용산 참사 등으로 이어지는 죽음에서 시대의 '슬픔'의 정치성과 합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글들입니다.

 


 

맨몸의_숭고와_&lsquo;비판적_삶&rsquo;의_종말,_작가.pdf

 

분가쿠좌담및일어본.pdf

 

분가쿠한국어본.pdf

 

애도우정공동체.pdf

 

의_입맞춤__혁명과_간통,_사랑과_소유권.pdf

 

장정일검열학회.pdf

 

제국의판타지와게토사이에서타협하며살기.pdf

 

파시즘과_&lsquo;해방의_정치&rsquo;의_딜레마.pdf

 

mora

 

 

 

 

 

서평회 준비모습

 

 

김대성 선생님의 서평회 사회모습

 

 

참석해주신 분들

 

 

권명아 선생님의 발표

 

 

이영미 선생님의 발표

 

 

권명아선생님/이영미 선생님

 

 

사회보시는 김대성 선생님

 

 

3인방 토크의 권명아 선생님.박홍규선생님.이영미선생님

 

 

이날 게스트로 참가해주신 김일두씨도 함께 3인방토크

 

 

신콩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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