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정리하는 후기

 

신현아

 

얼마 전 10월 11일,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주최 연속기획특강 제 14강으로 권명아 선생님의 서평회 <골치덩어리, 부적절한 정념 그리고 정동>이 있었습니다.

특히 이번 서평회에서는 최근에 출간된 도서인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에 관한 것 뿐 아니라, <역사적 파시즘>과 곧 나올 저작인 <음란과 혁명> 등 <외로움>에 이어지고 닿아있는 그간의 연구에 대한 흐름과 고민 등을 나누는 자리이기도 하였습니다. <골치덩어리, 부적절한 정념 그리고 정동>이라는 강연 제목 또한 이전의 연구에서부터 이어지는 지점들을 짚어주는 단어로 엮여 있어, 이 자리의 의미를 엿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하의 후기는 제가 기억나는 것을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권명아 선생님의 발표 내용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 날 정말 빠씨옹이 넘치는 열강을 해주셨습니다.

 

먼저 '골치덩어리'는 <역사적 파시즘>에서 약 30p가량으로 비교적 짧게(?) 정리되었던 개념이지만, 이 단상이 파시즘 연구에서 이후로 넘어가는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골치덩어리'라는 용어는 실제로 당시 총독부에서 다스려 지지 않는 인간들을 가리켜 썼던 단어라고 합니다. 당시 일본 제국에서는 식민지도 늘고, 이것 저것 사업도 많이 벌리고 하여 또 부지런하게 잘 되고 있나 안되고 있나 설문조사도 하고 통계도 내고 보고도 하고 분석도 하고 전략도 짜고 합니다. (일본 제국이든, 대영 제국이든, 제3제국이든 정말 제국은 미칠듯한 부지런함과 관료주의가 종특인듯) 그래서 아 이 사업은 참 잘되어서 호응이 좋구나, 아이고 여기에 아직도 저항세력이 있구나, 등등도 진단하고 욱일승천하는 제국의 일로를 가봅시다! 그럽시다!......라고 하려고 했는데..... 

 

.............별 응답이 없어......

 

당시 총독부에서 했던 여러 통계 등에서 다른 수치들은 시대나 상황에 따라 이러저러한 변동을 겪지만 거의 유일하게 큰 변동이 없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것은 바로 무응답/무관심이라는 부분이었습니다. 물론 뚜렷한 저항의 노력이 있어 왔고 이는 가시적인 자료 등에서도 드러나는 바입니다만, 이러한 무응답/무관심과 같이 어떤 특정한 의미로 규정되지도 포착되지 않기에 체계적인 자료로 남아있지도 않으며, '난센스적 일탈행위'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골칫덩어리들, 난센스적 일탈행위들은 커다란 틈새로 여전히 남아 '통제 체제의 일사불란한 관철을 막는 핵심적인 저지선'을 형성하지 않았는지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커다란 틈새'는 엘리트층의 단일한 적대구조와 같은 생존투쟁의 영역보다도 비엘리트층의 일상적이고 생활적인 영역에서 주로 나타나기에, 의미 없는 것이나 저항에 이르지 못한 개인적 불만 표출의 차원으로 간주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사료로 나타나지 않는', '저항으로 규정되지 않는', '의미 없어 보이는', '통일되지 않는'ㅡ '난센스', '골치덩어리'의 문제들은 이후 '풍기문란'에 대한 연구로 이어지게 됩니다. '풍기문란'은 '풍기'라는 규정되기 어려운 것을 '문란'이라는 애매한 법제을 통하여 통제하고자 했던 시도이기도 합니다. 풍기문란에 대한 연구는 일반적 '저항'의 자료들 속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골치덩어리들'을, 이들을 '풍기문란'이라고 규정하는 자들의 그 규정을 통하여 거꾸로 다시 찾아보고자 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거꾸로 다시 되짚는 과정 속에서 '다스릴 수 없는 자들'과 '부적절한 정념'으로 판단되었던 것들은 또 다른 의미를 갖고 떠오르게 됩니다.

(이건 제 생각으로 예를 들자면, 최근의 아동청소년보호법=약칭 아청법도 풍기문란 법규와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동성폭력이 수면 위로 자주 떠올랐던 최근, 아청법이 생겨났습니다. 이 아청법의 주요 단속 기준은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음란물에 관한 것인데요, 이 '음란함'의 기준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영상 또는 만화 (소설텍스트는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의 음란물에서 아동이나 청소년이 등장하거나 교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아동이나 청소년으로 인식된다면 아청법에 위반된다는 것인데요, 기준이 애매합니다. 성인이 교복을 입은 음란물은 문제가 되고, 설정은 미성년자이지만 성인처럼 생기고 성인처럼 보이는 만화캐릭터가 음란한 행위를 하는 동인지는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특히 동인계에서는 아청법 제정을 두고, "실제 여성이 성추행을 당하면 벌금 50만원에 그치는데, 가공의 만화캐릭터가 음란한 것은 왜 최대 2000만원이나 벌금을 내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거나, "왜 아동 보호같은 것에는 방점을 두지 않고, 이런 가상의 음란물을 단속하는 데에 더 방점을 두느냐"하고 들끓고 있습니다. 결국은 아동청소년보호법이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보호'가 아니라,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성인들의 '마음'을 단속하고 규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풍기문란'은 또 다른 바람이 됩니다. <서화>의 세 가지 바람, '풍기', 또는 '풍속'이라는 세속의 바람, 그 세속의 바람이 내 안에 전달될 때 뜨겁게 느껴지는 열정의 바람, 그리고 세속의 바람을 내 마음의 바람으로 옮겨다 주는 정동의 바람입니다. 정동은 이처럼 '풍기문란'의 '부적절한 것'한 것이자 붙잡히지 않는 마음-정념과 같은 것이 번져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법의 힘(면서기 김원준), 전통적 공동체의 힘(진흥회장 정주사), 저항의 힘(사회주의 전위 정광조)들이 바람을 자기 편으로 불게 하고자 움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떻게도 전유될 수 있는 동시에 어떻게 전유될 지 알 수 없는 바람입니다. 그러니, '골치덩어리들', 정념, 정동을 "이것이 대안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또는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기도 하지요.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역시도 어떠한 대안이나 새로운 힘을 내세우기 보다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나 '삶'이 어떠한 구조 속에 포획되는 것,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마음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인 구조 속에서 불안, 우울함, 외로움 등으로 전이되어가는 것 그 자체를 살펴보고자 했다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뭔가 우정이나 관계의 손길을 내미시는 제스쳐를 열정적으로 보여주고 계셨는데 멀어서 안보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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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과 답변

 

이하 서평회장에서 나왔던 질문과 답변을 정리하였습니다.

간단히 메모한 것을 재구성한 것이라 사실과 다른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

 

문: '부적절한 정념'으로 치부되어 버리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의 의미를 포착하고 정치성을 찾고자 하는 시도와 함께, '적절한 정념'이 있다면 그것에 대한 것은 어떻게 생각될 수 있을까요?

답: '적절한 정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마도 '환희'나 '기쁨'과 같이 긍정적인 힘을 끌어내는 것으로 말해지는 정념들을 말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한편으로 여기서 문제는 '부적절'과 '적절'이라는 규정과 기준 그 자체에 있습니다. 실은 '부적절한 정념'이라는 규정의 안은 규정의 의미가 없는 텅 빈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나누는 것은 법의 개념입니다. 적절한 존재와 부적절한 존재에 대한 것을 심문하는 것이지요. 이 심판에 따라 부적절한 것이 적절한 것이 되기도 하고, 적절한 것이 부적절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텅 빈 것에 대해 무엇이 정확히 적절하고 부적절한지를 나누는 것은 무규정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이런 것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무규정적인 질서들이 증식하게 됩니다. 이런 무규정적 질서의 증식을 아감벤 역시도 파시즘적 징후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기준과 규정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 정동의 힘들이 어떤 식으로 묶여질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들뢰즈는 이러한 정동적 힘을 '잠재성'으로 이야기하지만, 이 잠재성이 어떻게 바깥으로 드러나거나 함께 묶여서 어떠한 다른 것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이 때 '묶인다'라고 하는 것은 5.18과 같은 '사건'과 같은 것이라고도 생각하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답: 저는 그러한 '골치덩어리들', '풍기문란자들', '정념'과 같은 것들이 '조직'이나 명시적인 '저항'의 행동과 같은 것들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잠재로만 묻혀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50%에 달하는 무관심층'과 같은 경우에도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들을 갖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파시즘 체제의 거대한 걸림돌로 지속적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어떤 체제라도 모든 일상을 장악할 수는 없다"는 말이 있지만, 나치즘은 그것을 실제로 하려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체제는 결코 장악할 수 없는 부분을 남기게 되고, 그것은 바로 일상의 수많은 틈새들에서 튀어나오는 걸림돌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무관심'이나 '걸림돌'과 같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기존의 저항을 무화시키려 하는 거나 한 편이 더 의미가 있었다는 식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료에 명확히 남아있는 것들은 이미 '저항'이라는 이름을 얻어 우리들의 시야에 존재하게 되었지만, 그것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그것과 다른 것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다른 것'은 '저항'이나 '봉기'와 같은 기존의 언어로 전달이 되지 않는 새로운 세계이기 때문에 다른 방식과 다른 의미를 통해 접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식민지기의 문서로만 접근한다면 이 시기는 그야말로 암흑기입니다. 저항은 탄압당하고, 새로운 힘은 나올 구석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저항'으로 명시되는 자료들이 아니라, 당시의 범죄기록과 같은 것을 보면 이런 '골치덩어리들'에 대한 법규들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들여다보면, 이 골치덩어리들은 총독부와 경찰이 끝까지 연구하고 다가가려고 했지만 실패했던 것으로서 끊임없이 출현합니다. 저는 이러한 접근을 통하여 '암흑'의 시대가 아니라 다른 존재들의 다른 이야기들을 발견하고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 선생님에 앞서 여기서 강연을 해주신 오카 마리 선생님의 강연에서 다음과 같은 영화를 소개받았습니다. 매기라는 방탕한(?) 여자주인공은 정부에 의해 '엄마로서 부적절하다'고 판단되어 아이를 뺏기게 됩니다. 그리고 매기는 이후 '엄마'라는 것을 승인받기 위해 계속하여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을 다시 먹습니다. 선생님께서 <서화>의 돌쇠가 '골치덩어리'인 동시에 어떤 역능을 가졌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이 '매기'라는 여성이 법에 의해 적절성을 심판받고 이후 과잉된, 더욱 부적절한 행동으로 자신을 인정하고자 하는 맥락이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답: 감사합니다. 저에게도 반드시 참고가 될 만한 영화인 것 같습니다. '저항'이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적절성의 패턴이라면 이 정념들은 과잉되고 부적절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과잉되게 대항하는 매커니즘은 적절함을 요구하면 오히려 부적절함으로, 과잉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서화>에서는 초반에 애기장수설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돌쇠가 애기장수에 빗대어져 있는 것인데요, 애기장수는 한편으로는 이 세계에서는 통용이 되지 않기 때문에 없어져야 하는 힘입니다. 하지만 이기영은 <서화>에서 이 '돌쇠'가 애기장수처럼 없어질지, 또는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그리고 있지 않습니다. 정작 이 힘이 어디로 갈지는 모르고 나오지 않는 것이지요. 이기영 역시도 <서화>의 이러한 '바람'과 힘에 대해 기미운동 전의 조선의 모습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들불처럼 어떻게 번질지 알 수 없는 힘인 것이지요.

그 영화에 대해서 또 다른 면에서 보자면 <풍기문란>은 언제나 성에 관한 것으로 인식되어지지만, 그것이 본질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겠습니다. 풍기문란은 실은 '생산성'에 대한 관리입니다. 떠돌아다니는 노동자, 농땡이부리는 학생들처럼 '비생산적'인 것들을 생산적인 것으로 끊임없이 규제하기 위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 생산성에 대한 관리는 여성에게 있어서 특히 자궁의 생산성에 대한 관리로 이어집니다. 피흘리는 자궁을 아이를 생산하는 적절한 자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도박과 간음을 일삼는 돌쇠와 아이를 낳아서 먹어버리는 자궁/엄마에게는 아주 다른 듯 하지만 같은 의미의 과잉이 존재합니다.

 

 

문: 선생님의 작업은 상당한 기간의 역사작업을 통하여 현재에 대한 탐색까지로 이어져왔습니다. 선생님의 역사작업 방법론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답: 이잡듯이한달까요... (웃음) 요새는 이런 연구들이 꽤 나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검열, 풍속괴란, 풍기문란, 치안과 같은 것들에 대한 것이지요. 그런데 '검열'이라고 하면 치안에 관한 자료가 대부분이고, 연구 또한 사상 검열에 관한 것이 주가 되고 있습니다. 문서나 도화에 대한 검열같은 것인데, 통계적으로도 이러한 검열의 문제가 많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연구되는 '사상검열'이라고 하면, 사상검열에 해당되는 주체들은 대부분 사상서를 쓸 수 있는 사람인 엘리트층에 한정이 됩니다. 실제로 총독부에서도 이잡듯이 검열을 하여, 조선의 출판시장을 전부 통제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당시의 민중들이 실제로 제일 많이 보는 것은 춘향전이나 심청전과 같은 것이었고, 당시 총독부에서도 이를 인지하여 구시대적인 것을 단속하고자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후에는 족보, 춘향전, 심청전과 같은 것들이 단속 대상이 되지만, 문제는 이러한 책들은 근대적 출판시스템으로 유통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 많이 모이는 장터에서 팔고 사라져버리는 식으로 전해졌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검열과 통제는 현장을 덮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되고, 이것은 기록에 잘 남지 않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이처럼 일상에서 일어나는 검열, 풍기문란 통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면, 자료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시야를 바꾸어 보면, 당시 새로 추가되었던 법률에 관한 자료 등에서 장터 단속에 대한 법을 계속 추가하는 것에서 풍기문란 단속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전혀 관계가 없어보이는 텍스트들, 범죄기록, 법전과 같은 것을 왜 보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일반적인 자료와 방법론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것들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다른 문법과 시야를 통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면에서 말씀을 드리자면,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과 같은 경우는 역사작업과는 좀 다른 방법론으로 쓰여진 책입니다. 최근 이 책처럼 역사작업과는 다른 방식의 글쓰기나 작업에 더 의욕을 가지게 된 것은 부산에 오게 된 것이 큰 계기로 작용하였습니다. 저는 항상 지배적인 연구방법과 다른 연구방법론으로 접근하는 그 투쟁에 의미를 두었고, 그래서 역사작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산에 내려온 이후 초반에는 역사자료에 대한 공동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 와서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이러한 역사작업 조차도 실은 이미 학문장의 성과가 많이 쌓여있는 매커니즘 속에서 가능한 것이라는 겁니다. 즉 어느 팀에서는 이 자료를 연구하고, 또 다른 팀에서는 그와 다른 관점에서 또 다른 자료에 접근하고 있으며, 또 어떤 팀에서는 어떤 자료를 새로이 입수하였다는 것과 같이, 연구에 대한 지평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주류'의 방법론이 있는 것이고 또 그것과 싸우는 또다른 방법론 역시도 그것에 비추어 다른 그림을 그려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산에는 이러한 거대한 협업과 분업의 구조나 자료가 거의 없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작업을 계속 고수하는 것은 이전의 상황과 관련된 것이지 지역의 연구자들과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대에 바로바로 개입할 수 있는, 게릴라전 식의 글쓰기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연구작업이나 결과물을 내는 패러다임이 하나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운이 좋다고도 할까요...? 연구자들은 연구를 하다보면 관성이 생기지요. 어쩐지 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 아는 것만 같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만 같고......실은 그게 아니겠지만요. 그 관성의 갱신은 결국 새로운 현실의 압박으로 생기는 것이잖아요. 제가 여태까지 놓여져있던 곳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 연구자로서, 연구의 동력, 열정은 외부로부터 온다고 봅니다. 모르는 대상이 있으니 달려들게 되고, 궁금증이 생겨나고...... 그래서 삶의 반경이나 운명과 같은 개념들에 대한 단서들이 있었지만 구체적인 실감과 말을 얻게 된 것은 부산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서였습니다.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의 4장에 실린 표제작(?)의 서두에는 다문화강사 K씨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실은 부산에 와서 만났던 이 분에 대한 짧은 이야기에 이 책의 모든 것이 녹아 있습니다. 그리고 풍기문란의 대표격이라 할 장정일에 대한 글 역시도 이전에는 제가 참 많이 글을 쓰고 접근하여 왔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도 지역의 아이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다시 보니,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하는, 그러한 구조와 지역이라는 위치와 성장해나가는 삶의 반경이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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