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모임 아프콤에서  다큐맨터리 <철학에의 권리> 의 감독님이신 니시야마 유지씨와의 인터뷰 및 독립 '비정규대학' <지하대학>의 탐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먼저 저희와 함께 해주시는 신지영 선생님께서 지하대학에서 철학에의 권리를 상영한 일을 소개해주셨던 글을 인트로로 올려봅니다^^

원 출처는 그린비출판사 블로그 : http://greenbee.co.kr/blog/966 입니다~

 

지식 게릴라들의 대학제도 이용법!, 신지영

비정규대학 "지하대학"에서 다큐 「철학에의 권리」를 보고
ㅡ일본에서 마을 만들기 8

* 우리는 국가 등록 인문학자
학교에 대해 논의하는 건 고리타분한 기분이 들어서 싫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나는 대학제도가 너무나 필요해 속앓이를 한 적이 있다. 무작정 일본으로 간 탓에 한동안 소속이 없었던 때의 일이다. 당장 써야 할 글이 있는데 대학 도서관을 이용할 수 없으니 손발이 꽁꽁 묶인 듯했다. 책을 찾아볼 수도 빌릴 수도 없고, 인터넷도 프린터도 복사기도 이용할 수 없었다. 동네 도서관에 등록을 해 보았지만, 내게 필요한 책들도 검색기능도 그곳에는 없었다.

그때 두 가지를 깨달았다. 한국에서 나는 대학 밖에 있다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지만, 실은 대학에서 부여해 주는 여러 요소들을 손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제도권 밖이라고 생각했던 공동체도 나에게 이른바 제도처럼 안정적인 공부환경을 제공해 주었다. 나는 그것이 제도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폭력적으로 그 안정적인 지위를 이용했을 수도 있다. 활용하기에 따라서 대학 안은 대학 밖이 될 수 있으며, 제도권 밖은 늘 제도가 될 위험과 직면해 있었다. 또한 불안정한 신분 때문에 제도가 탐날 때에는 그 제도에 대해서 비판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점에서 ‘고리타분’이라는 말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고리타분’이란 인류가 오랜 기간 여러 차례의 실수를 통해 습득한 필요요건을 갖추어 놓았음을 의미하고 있었다. 나는 고리타분이라는 안전장치 속에서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고리타분하다고 불평할 수 있는 도련님이었던 것이다.

또한 고백하건대 최근 나는 국가 등록 연구자가 되었다. 이른바 ‘학진 시스템’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공부와 연구로 돈을 벌 방법이 없다. 등재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이 아니면 실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내가 써 온 글은 학술잡지에 실리지 않은 게 대부분이라, 그곳의 기록방식에 따르면 내 몇 년간은 실적 없는 공백이다. 한국의 모든 연구자들이 거기에 등록되어 있다! 대학원까지 졸업하면 훨씬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국가적이고 자본주의적 평가제도와 일대일로 대면하기 시작한 느낌이 든다. 그나마 학진 시스템 덕분에 혈연‧지연에 따른 연구풍토가 개선되었다고 하니, 그 이전의 상황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 사건으로서의 다큐상영 「철학에의 권리」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인문학과 대학의 위기'는 죽은 유행어가 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 일본에서는 ‘대학’을 새롭게 묻는 움직임이 보인다. 최근 1~2년 사이에 대학의 기능과 역사에 대해서 물음을 던지는 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대학의 탄생』(大学の誕生 上·下, 天野郁夫, 中公新書, 2009), 『대학의 역사』(大学の歴史, クリストフ シャルル、ジャックヴェルジェ、文庫クセジュ、2009), 『대학의 반성』(大学の反省, 猪木武徳, 日本の現代11, 2009. <일본경제신문> 2009년 12월 26일자 소개) 등이 그것이다. 또한 유명한 잡지 『現代思想』은 2008년 8월에 ‘대학의 곤란’(大学の困難)이란 특집을, 2009년 11월에 다시금 ‘대학의 미래’(大学の未来)라는 특집을 다룬다. 특히 2008년 특집에는 2004년 국립대학들의 독립 행정법인화 이후 대학의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글과 함께, 일본의 대안적 지적 공간들을 소개했다. 그 대안공간들은 ‘대학의 밤’(大学の夜)이라는 와세다 대학 생협, 고엔지의 ‘지하대학’(地下大学), G8 서미트 반대운동 기간 중 북해도에서 생겼던 ‘캠프대학’(キャンプ大学)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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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반성, 대학의 곤란, 그리고 대학의 미래


대학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시작된 것은 1991년 이후 일본 대학의 설치 기준 자유화 이후 교양과목의 축소, 2004년 국립대학의 독립 행정법인화 이후 대학에 대한 포괄적 평가와 운영 시스템이 확립됨에 따라 진행된 대학의 기업화 및 그에 따른 고학력 실업자의 증가와 관련된다. 이런 경향은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HK와 BK 사업단이 고학력 실업자의 수를 줄였으나 동시에 기업과 같은 관리체제가 대학 안으로 깊숙이 침투했다. 등재지 논문의 실적주의는 글쓰기 방식을 논문형태로 고정시키고 있으며 연구자들 사이의 경쟁을 부추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니시야마 유지(西山雄二) 씨는 파리의 국제 철학 콜라주에 대한 다큐멘터리 「철학에의 권리」(哲学への権利)를 만들어 일본의 대학 및 대안적 지식 공간을 돌며 상영하고 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상영방식이다. 도쿄뿐 아니라 각 지방의 주요 대학 및 자생적 지식 공간을 돌며 상영한 뒤, 지적 공공 공간의 문제를 전면에서 논의한다. 그 토론내용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 공유한다(홈페이지 가기). 일본의 순회 상영이 끝나면 프랑스와 미국, 한국 등지에서도 상영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한다. 다큐멘터리를 상영하는 것 자체가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국제적 사건으로서의 상영’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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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철학에의 권리」

다큐멘터리 「철학에의 권리」는 현재 파리의 국제 철학 콜라주에 참여하고 있거나 참여했던 사람들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국제 철학 콜라주는 1983년 자크 데리다가 중심이 되어 만든 자유대학이다. 누구든 커리큘럼을 짜서 강의를 하고 누구든 들으러 올 수 있다. 국제 철학 콜라주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부터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까지 다양하며, 전문분야나 관심분야도 천차만별이다. 이 활동을 위해 필요한 돈은 프랑스 국가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대학처럼 돈을 주는 대가로 연구활동을 기록하게 하고 관리하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지식인과 대중이라는 틀을 넘어서 다양한 위치의 발화자들과 다양한 학문들이 접속하는 장인 국제 철학 콜라주, 그리고 그것을 찍어서 일본의 대학 상황 속에 집어 던지는 행위. 그것은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철학’의 전제를 깨뜨려 갈 권리에 대한 요구이자, 그것이 가능한 공간에 대한 요구였다.

* 지식 게릴라들의 아지트 ‘지하대학’
내가 「철학에의 권리」를 ‘지하대학’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두번째로 이 영화를 보러 온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확실히 누구랑 어디서 보는가가 중요한 것 같아.” 그렇다. 지하대학은 그런 곳이고 ‘그런’ 사람들이 ‘함께’한다. 소속도 연령도 제각각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조건에 진지하게 개입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적어도 ‘함께’가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함께 먹는 것, 함께 보는 것, 함께 듣는 것, 함께 행동하는 것, 함께 논의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하대학’의 시도는 「철학에의 권리」가 추구

 

 

하는 바를 현실 속에서 구현해 가고 있었다.

 

 

지식의 게릴라 아지트 '지하대학'


‘지하대학’에는 “비정규대학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지하대학은 고엔지 마을(상점들의 네트워크 마을)의 제12호점인 다목적 아지트에서 열리는 공공적 논의장이다. ‘지하대학’의 선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말을 빼앗기고 있다. 노래를 빼앗기고 있다. 사상 등은 먼 옛날에 사라져 버렸다. …… 그리고 지하대학이 시작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쇠사슬을 자르는 '지식'이며 철의 이빨을 부수는 '기술'이다. 교양주의를 파괴하는 '교양'이다. 대항 심포지엄을 대학 밖으로 거리로 밤으로 열어젖히는 시도이다. …… 지하대학은 신음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노래가 되는 바로 일보직전에 머물 것이다. 지하대학은 밤의 거리, 그 수렁을 방황하는 TAZ(일시적 자율 공간)이 될 것이다. 왜냐면 장소는 빼앗기고 있기 때문에.

한 달에 한번 열리는 지하대학에서는 다니가와 간(관련글 보기)과 같은 사상가, 일본에서의 68~69 정치투쟁에 대한 다큐 상영, 사회운동에 관련된 서적 평론회, 정치 문화 모임 소개 등이 이루어진다.

「철학에의 권리」가 상영되던 날, 45석쯤 되는 지하대학은 금방 만석이 되었고 서서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지하대학을 주도하는 음악평론가 히라노(平井玄) 씨와 대학에 대한 논의를 주도하는 조치대학(上智大学)의 시라이시(白石嘉治) 씨가 참여한 토론은 열기가 뜨거웠다(토론내용 참조 >>). 히라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칸트가 마이너리티(minority)도 이성이라고 했음을 상기시키면서, 국제 철학 콜라주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의 의의를 설명했다. 마이너리티란 미성년자와 소수자를 동시에 지칭하는 말로, 비합리적인 것을 통해 새롭게 형성되는 이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국제 철학 콜라주가 68혁명의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하면서 일본의 68~69 정치활동 및 현재의 게릴라적 지식활동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을 설명했다. 데리다의 ‘조건 없는 대학’을 근간으로 한 다큐이지만 데리다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현재의 사건이 되고 싶어 하는 다큐. 그것이 ‘지하대학’에서만 단 한 번 상영될 수 있는 「철학에의 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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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대학에서 「철학에의 권리」 '함께' 보고, '함께' 논의하기


아마도 이 다큐가 국가나 제도라는 그림자로부터 가장 자유롭게 논의된 공간이 일본에서는 ‘지하대학’이 아니었을까. 고엔지의 채식주의자 카페의 식단을 담당하고 있는 요요짱은 “전부 공짜라는 게 무척 놀랍다”라고 했다. 나는 국제 철학 콜라주가 여러 공간을 전전하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 놀라웠다. 논의는 논의의 배경에 대한 심각한 고민 이전에, 새로운 사실과 지적 자극에 대한 이런 놀라움과 호기심으로 차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연구자 등록을 눈앞에 두고 있던 나로서는 강렬한 공감과 강렬한 반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 다큐가 표방하는 것이 만인을 위한 철학의 권리라는 점, 국제 철학 콜라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열정적인 인터뷰가 마음을 쳤다. 반면 ‘대학’을 재건하려는 듯한 분위기와 '국가로부터의 지원'을 최대한 이끌어 내는 데 모두들 동감하고 있다는 것에는 어쩐지 거리를 두게 되었다.

* 지식 게릴라들의 제도 이용법
집에 돌아오는 길엔 두 명의 친구와 “만났고”, 길가에 서서 “토론했다”. 친구와 나는 가장 래디컬하게 보이는 일본 지식인조차 왜 늘 '국가의 지원'에서 시작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제도의 밖이 없다는 것엔 나도 그녀도 공감할 수밖에 없다. 나는 연구자 등록을 해야 그나마 연구비 신청이라도 할 수 있다. 그녀는 시인이나 소설가들도 등단하게 되면 국가로부터 지원금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 혹은 국가의 바깥을 상상하길 멈추어선 안 된다는 데 동감했다. 많은 일본 지식인들의 발상법에는 복지국가에 등록된 지식인이 지닌 무기력과 허무주의 그림자가 있었다. 길거리에 서서 열변을 토하고 있으니 사회활동에 열심인 대학원생 친구가 나타났다. 그 친구는 아마 지하대학의 뒷정리를 하고 오는 참이었을 텐데, 우리가 오래 서 있긴 했던 모양이었다. 그 친구는 “이번 지하대학엔 활동가들이 별로 안 왔어요”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동네 도서관에서 내게 필요한 책을 구할 수 없는 것처럼, 대학을 논의하는 장에는 활동가들이 필요한 무언가가 없는 것일까…….

그러나 그날의 무엇보다 중요한 성과는 우리가 다큐와 지하대학의 열기에 힘입어 전철역에 한참 서서 이야기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런 우연하고 우발적인 토론의 공간들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한 달에 한 번 자신의 집을 토론 공간으로 개방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누구나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직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대학을 패러디하기 혹은 대학을 전전하기 혹은 대학을 이용하기, 그 매뉴얼들이 다양해졌으면 좋겠다. 나에게도 그것은 이제 현실적인 문제로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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