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삼동-바다의 말

 

 

金 飛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 바다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 앞에 선 듯 바다 앞에 서면 괜히 뭉클해진다. 어차피 바다라는 세계의 모성을 헤아리는 일은 나에겐 불가능한 것인데, 닮은 얼굴이라도 확인하려는 듯 나는 한동안 묵묵히 바다만 바라보게 된다. 나라는 생명을 지상으로 끌어올린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존재를 고민하기 이전의 근심이 떠올라 어쩐지 자꾸 먹먹해진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바다가 품어 안은 마을은, 바다에 기대어 살고 있는 마을은 그렇게 포근하고 평화로운 감상을 일깨운다.

 

  애초에 부산의 바깥을 돌아보기로 계획하면서, 그래선지 바닷가 마을에 대한 기대는 제일 크게 부풀어 올랐다. 부산이라는 이름 뒤에 따라오는 무수히 많은 해수욕장과는 멀리 떨어져, 오롯이 바다에서 나고 바다의 힘을 빌어 평생을 살고 있는 순수한 마을과 사람들의 풍경을 꼭 사진으로, 글로 담고 싶었다. 어차피 내가 바라는 기대와 여기에 실재하는 시간 사이의 괴리가 크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꾹꾹 눌러 담은 기대는 이미 차고 넘쳤던 것 같다.

 

  가장 어렵고 난해한 문제일수록 의외로 가장 가까운데 해답이 있다고 했으니, 그래서 나는 부산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태종대 뒤편의 바닷가 마을 동삼동을 목적지로 정했다. 하루 수천 명의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관광지 주변을 목적지로 정하고서도, 나는 가장 가까운 바깥에, 가장 소외되어 있는, 그래서 더욱 순수한 마을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어리석게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동삼동까지 조금 걸어 내려가야 하는 정류장에 도착하고서도 나는 저녁 무렵의 풍경을 사진에 담기 위해 네 시간 정도 더 그곳에서 기다렸다.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는 한낮의 뜨거운 햇살만큼 재미없는 빛은 없기에 좀 더 내가 기대하는, 마을 풍경과 어울리는 빛을 만나기 위해 그 정도 시간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어느새 조금씩 햇살이 피로해지기 시작할 무렵, 나는 관광객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태종대 입구 아래로 빙 돌아가게 되어있는 동삼동 외곽 마을의 입구는 다른 세계로 안내하는 이상한 나라의 구멍 같았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가에 거대한 철의 벽이 드리워 있는 것을 보면서도 나의 기대감은 여전히 견고했다. 사각의 구멍 너머로 용도를 알 수 없는 구조물들이 서 있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고즈넉한 바닷가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감지해변이라는 이름의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먼 바다는 기대했던 대로 평화롭게 서서히 저녁 빛으로 물들고 있는데, 해변가에는 술에 취한 관광객들과 호객을 하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뒤엉켜 있었다. 크지 않은 해변은 식당의 가건물들로 모래 한 자락 보이지 않게 꽉 들어차 있었고, 파도가 들이치는 바닷가에는 가건물들에서 나온 무수히 많은 푸른 호스들이 바다까지 길게 드리워져 뒤엉켜 있었다. 조용하고 한적한 저녁 무렵의 바닷가 마을을 상상했던 나는 망연자실 망망대해를 넘겨보았고, 인공호흡이라도 하듯 호스를 꼽고 있는 바다 곁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이곳의 생존 방식 아닌가. 모든 편견이나 선입견이 그러하듯 그것은 비단 타인의 것만이 아닌, 어리석은 나의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편견의 당사자인 소외된 자들의 편견이나 선입견은 그 어떤 것보다 지독하고 고약하지 않은가.

 

 

  나는 홀로인 나를 붙드는 상인들의 손을 웃으며 물리치고는 마을 쪽으로 걸었다. 왠지 헐떡이는 것만 같은 바다의 모습을 돌아보지 않으려 애를 쓰며 천천히 비탈에 자리한 마을로 들어섰다. 마구잡이 자란 초록의 풀들을 따라, 그 속을 비집고 드리운 작은 길들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몇 개 되지도 않는 집들을 지나 비탈에 올라서니, 마을 한 가운데가 텅 비었다. 아니 빈 것이 아니라 갖가지 이해할 수 없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야적장인지, 산업쓰레기들을 모아 놓는 곳인지 마을 한 가운데 널따랗게 자리한 곳에선 퀴퀴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듬성듬성 초록의 풀들이 뒤엉켜 있었지만 그건 자연스럽지도 그렇다고 정겹지도 않았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구조물들과 녹슨 물건들에 뒤엉켜 그건 차라리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시 비탈을 내려와 나는 고약한 냄새가 풍기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수풀이 우거진 한 가운데로 나무판자가 이리저리 놓인 길이 나 있었다. 한 발 내디뎌보니 늪에라도 들어선 듯 그 아래가 출렁거렸다. 위태로웠지만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끝까지 판자 길을 따라가니, 작은 실개천으로 생전 처음 보는 색깔의 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늘색 빛을 띤 물이었는데, 하늘빛이 드리운 것은 아니었다. 그토록 이물스럽고 안타까운 하늘색은 생전 처음이었다.

 

  나는 한참을 그곳에 서서 허망하게 마을을 둘러봤다. 바닷가에서는 계속해서 고성이 들려왔고, 마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퀴퀴한 냄새로 가득 찼다. 비탈에 힘없이 선 어느 집에서 뒷짐을 진 주민이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내려보고 있었는데, 그곳에 서있는 내가 참으로 죄송스러웠다. 그곳이 오래도록 그 분들의 생활공간이라면, 내가 떠올리고 있는 그 모든 생각과 감정은 불손하고 오만한 것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어깨가 축 늘어져 다시 푹푹 빠지는 판자 길을 돌아 나오는데, 비탈 한 쪽에 무언가를 열심히 심고 계시는 주민이 보였다. 이토록 안타까운 시간 속에도 묵묵히 미래를 심고 계시는 그 분이 참으로 반가웠다. 그리고 나는 한참이나 그 분 앞에 서서 한 알 한 알 미래를 심는 그를 경외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내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는 계속해서 흙 속에만 얼굴을 묻고 계셨고, 그의 모습 너머로 어디에서 솟았는지 알 수 없는 태극기가 촐싹맞게 펄럭거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만났던 것은 진정한 소외의 풍경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름답고 예쁜 소외를 꿈꾸었던 어리석은 내 앞에, 가장 극단적인 모습으로 소외의 맨 얼굴이 드러났던 건지도. 하지만 이것이 그들의 삶이 아닌가, 아무리 내가 기대하는 모습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이곳에 그들의 삶이 있지 않은가. 나는 엇갈리며 떠오르는 그 복잡한 생각들을 바쁘게 오고가면서, 술에 취한 관광객들과 상인들이 뒤섞인 그곳을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우리의 안타까움은 왜 매번 그토록 게으른가. 여기를 지키는 것과 나를 지키는 것이 충돌할 때, 현명함이란 얼마나 잔혹해지는가. 소외되지 않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그 많은 시간의 늪을 어떻게 건너야하는 건가, 해답이란 진정 가능한 것인가.

 

  나는 자꾸 먼 바다만 바라본다. 엄마가 답을 해주기를 기다리는 철부지 아이처럼, 하지 못한 말들을 두 볼 가득 담고서 길을 잃어 엄마를 찾듯. 물론 우리를 낳고 키운 바다는 언제나 그랬듯 말이 없다. 세상의 모든 엄마처럼, 바다는 오늘도 비명을 삼키고 있는 모양이다.

 

 

사진: iphone 4S © 김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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