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이 말하는 것과 말하지 못하는 것

 

 

 

신현아

 

 

먼저 질문의 개인적 연유를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모자란 추상성을 조금이라도 구체화 할 수 있을 듯하다. 함께-있음의 사이-공간에서는 끊임없이 갖가지 감정들이 들끓어오른다. 양창아 선생님의 글에서만 해도 두려움, 용기, 기쁨, 고통, 거북함 등등이 넘치고 아프-꼼의 언어들 속에서도 부대낌, 기쁨, 슬픔, 외로움 등등이 돌출된다. 나는 그 중에서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두려운 것이 많았다. 보잘 것 없는 내가 자꾸만 드러나버리는 것이 두려웠고, 내가 작아지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들이 오히려 나를 더 인정하라고 외치는 인정투쟁이 되어버리는 것, 그로 인해 내가 다른 이들을 점차 믿지 못하거나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부족한 사람이더라도 괴물이 되지는 말자는 다짐은 자꾸만 다시 꺼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이 두려움을 삼키기 위해 끊임없이 받아온 베풂과 관계의 추억들을 생각했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허둥거렸다. 그러나 허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허겁지겁 쑤셔넣을 때, 음식의 맛이나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나 나눴던 이야기들이나 그 때의 공기들을 결코 기억할 수 없듯이, 두려움에 빠져서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허둥거렸지만 정체되었고, 결국 두려움을 쉽사리 떨치기 어려웠다. 지금은 오히려 내가 나의 보잘 것 없음을 하나의 상태로 생각하고 하게 인정했다면 보다 다른 이행의 길이 열렸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왜 그렇게 되지 못했을까. 그 두려움이 무엇이길래, 나는 결국 그 어떤 용기를 갖지 못했을까.

 

물론 타인의 오해나 시선에 대한 두려움은 비단 작은 공동체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두려움이 작은 공동체 속에서는 더욱 문제적인 것으로 커져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작은 공동체일수록 서로 간에 건네는 신뢰와 애정이라는 무형의 것에 의지하여 속세의 파도를 헤쳐나갈 수밖에 없으므로, 이 두려움의 문제는 더욱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내가 이 두려움에 대해서 아직 더 깊게 생각하지 못했고, 이를 타파할 명확한 답을 찾은 것 또한 아니라 이렇게 선뜻 질문을 하고마는 것이 무책임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염려가 된다. 그러나 이 자리를 빌어 하나의 가닥을 잡아가고 싶은 마음에 부족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여기에 함께 있음, 사이-공간, 공동-. 언제나 헤어나지 못하고 다시 마주하는 나와 너 사이의 간극을 돌파하고 여기에 있기 위한 수많은 실험과 노력의 목록들이다. 물론 우리는 이 이름들을 실험이나 노력과 같은 단어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불충분함을 알고 있다. ‘실험이라는 말에는 기획, 투신, 기대, 희망, 결심과 같은 것들이 채 담기지 못하며, 노력이라는 말로는 그 이상의 노동, 애씀, 보살핌, (지어냄과 쥐어짜냄을 모두 합친) 짜냄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다만 알기만 할 뿐이며, 그래서 결코 끝까지 알지 못할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함께-있기 위하여, 다시 함께 하기 위하여, 결코 충분치 못해 실패할 말들을 펼쳐낼 뿐이다.

 

그러니 을 펼쳐내는 것은 한편으로 을 펼쳐내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몸은 함께 있는 서로가 스민, 사이-공간의 공기들이 들고 나감으로써 만들어진 소우주로서의 이며, 공동-체의 몸() 역시 함께-있음으로 하여 만들어진 이다. 우리는 이 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말해야만 한다. 나라는 몸의 소우주 안에 무엇이 스며있는지, 당신이 어떻게 자국으로 남았는지를 말하고, 공동-체의 몸에 우리가 어떻게 스미고 스미지 못했는지를 말해야 한다. 이는 공과의 나눔이 아니라, 내 안에서 당신의 자리를 찾고, 함께-있음의 자리에서 당신의 자리를 찾고, 그리하여 스밈에 감사하며 스미지 못했음을 알고 다시 나아가는 일이다. 그리하여 말로서 몸의 수많은 자국들을 말로 펼쳐내는 것이다. 물론 이 펼침은 언제나 실패한다. 나는 말이 펼쳐냄의 일임을 언제나 몰랐다. 이것은 실패이다. 그리고 말로서 다시 또 다시 펼쳐내어도 우리는 담지 못하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것 또한 실패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 채 담지 못하는 것들이 존재함을 다시 가능성이라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자리의 또 다른 질문의 이야기의 시작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야기를 위태롭게 자아내는 어느 여자의 밤들에 있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는 또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의 끝없는 펼쳐짐이 어찌하여 우리에게는 가능성인 동시에 실패일 수밖에 없는가. 나는 그것을 두려움이라는 또 다른 말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두려움이라는 말은 관계의 두려움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이해를 바라며 무언가를 전하고자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오해할까봐, 아니 정확히 말해 자신도 알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드러나버릴까봐,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동료들이 혐오하는 것이 될까봐(이는 동시에, 그 시선이 자신에게 돌아와 자기 자신을 보는 시선에까지 영향을 미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의 두려움을 말하기도 한다. (관계가 본디 말이기에 이것은 동어반복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두려움으로 자아내는 말이 있음을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처음에 이 질문지에 여러 가지를 인용하여 이어붙인 글을 만들었다. 그 글은 초안이라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추상적이고, 종착점이 불분명한 글이었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이 두렵고, 말을 함으로써 보잘 것 없는 나의 깊이가 드러남도 두려워, 나는 그런 글을 썼다. (이것을 깨달은 것 또한 함께 있는 이들의 을 통해서였다.) 이러한 말은 더 나은 관계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두려움이 추동시키는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말에는 이러한 위험이 더욱 깊게 존재한다. 더 나은 기교와 더 나은 수사로 이것을 치장해버리고, 자신을 보존한다. 어쩌면 이것을 두려움으로 느끼는 것이야말로 함께-있는 이들이 언제나 나를 깨워준 덕분의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말들은 언제나 그 순간의 두려움을 모면한 후에, 사라지고, 휘발되고, 잊혀진다. 그러니 한편으로 문제는 두려움을 극복할 용기 (또는 기쁨)의 이전에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가를 묻는 것이기도 하겠다.

 

앞서 이 두려움은 시선에서, 오해에서, 드러남에서 기인한다고 하였음에도 이것을 다시 생각해본다. 어떠한 시선이 두려운가? 내가 실은 보잘 것 없다는 그 자체인가? 아니면 그것이 드러나는 것인가? 내가 보잘 것 없다는 그 자체의 두려움이라면 그것은 또 다른 나아감으로 향하는 것이다. 함께-있음은 말을 펼치고 몸을 펼쳐 나아감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문제는 스스로가 보잘 것 없다는 것이 부끄럽고, 그것을 견디지 못하여, 그것이 드러남 자체를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더 나은 사람으로 있고 싶고, 사랑받고 주는 좋은 사람이고 싶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보잘 것이 없고, 이 보잘 것 없음이 변하는 것은 멀고 어렵다. 그것이 두려워 나는 미래의 내가 좋은 사람으로 함께 있게 되는 것보다 지금 당장의 작은 호의들을 건넨다. 그러니 용기의 문제는 한 편으로 내가 보잘 것 없음을 넘어서기 위한 용기이기에 앞서 그것이 드러남 자체를 두려워하는 그것에 대한 용기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으로 여기에는 또 다른 오해의 문제가 존재한다. 누군가가 나를 오해하는 것만이 아닌, 내가 너를 오해하는 것. 이는 단순히 내가 잘 몰랐다거나,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의 오해는 내가 언제나 안고 가야만 하고, 계속 쌓고 풀어내고 쌓아가는 문제라 하겠지만, ‘의 오해는, 또는 두려움의 오해는 언제까지나 안고가서는 안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두려움의 오해는 내가 남의 생각보다 훨씬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서부터 나타난다. 남들은, 또는 함께-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확하게 나의 보잘 것 없음을 본다. 또는 대부분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만보잘 것 없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이 만큼의 자신을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여 두려움을 키워간다. 나는 본디 이런 사람인데, 저 사람이 나를 훨씬 과소평가하여 오해한다는 오해가 분노가 되고, 저 사람이 나를 훨씬 과대평가하여 오해한다는 오해가 좌절감과 두려움이 된다.

 

스스로 풀어버리지 못한 두려움오해는 곧 불신으로, 함께-있음의 불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사이-공간에서 생겨난 두려움으로 인하여 함께-있음에 대한 신뢰에 균열이 생기는 것이다. 타인의 눈에 대한 오해, 나의 부족함이 다른 이들과 나누어 짊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부끄러움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등등, 이러한 오해들은 결국 함께 있는 이들을 충분히 믿지 못함이기 때문에, 신뢰를 갉아먹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결국은 함께-있음이 불가능해 지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두려움과 오해는 함께-있음, 사이-공간, 공동-체들의 저변에서, 곳곳에서 돌출한다는 것이다. 이 두려움을 딛고 가는 것이 균형을 맞추어 가는’, ‘이음매 위에 서는 것이라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두려움은 딛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이기 보다는 사로잡히는 순간 함께-있음을 불가능하게 하고, 사이-공간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이기에, 균형과 평정을 그리고 신뢰를 끊임없이 흔들어놓는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흔들림의 위에 계속 서있는 것이 (마치 배멀미같은) ‘거북스러움이기도 하겠다. 그러나 이는 단지 고통을 넘어선 환희를 통해서 극복될 수 있는 문제일까? 받아들임이 더 나은 평정이 될 수도 있지만, 결국 토하고 갑판에 눕는 것이 될 수도 있을 때, 이 거북스러움을 다시 견디어 나가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또 다시 ‘~것을 묻는다질문의 종착점에 닿는 것을 실패하였다. 또는 동어반복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 실패는 내가 아직도 드러남을, 또는 가닿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어떤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스스로는 그 것을 결코 알 수 없다는 점에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실패로서 어떠한 드러남을 하였다. 그러나 어쩌면 이 실패가 다시 무언가가 일어나는 자리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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