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고통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어떤 장소로부터

 

 

 

양순주

 

 

1.

 

“‘-기쁨’/‘-고통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어떤 장소”, 그것은 어딘지 알 수 없거나 정해지지 않는 장소가 아닌 구체성의 장소이다. 그곳에서부터 기쁨과 고통이 흘러나오고, 그곳으로부터 글쓰기가 가능하다. 양창아의 글 역시 공간초록이라는 구체적인 장소로부터 흘러나온 말들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에 장소와 그것의 구현으로서의 말(기쁨/고통)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관계 변화의 시작이 되는 또는 그 시작을 알리는 은 기존의 논리에 저항할 수 있는 정교한 대항 논리를 마련하는 일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여기 있다고 말하는 하나의 행위이며, 그것은 또한 기존의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감지하고도 또는 감지했기 때문에 그 받아들일 수 없는 몸을 드러내는 사유-행위이다.

 

관계 변화의 시작은 양창아의 말 또는 글 곳곳에 무수한 동료들의 말들과 함께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진정 말로써 그리고 글로써 우리여기에 있다. 이 텍스트 자체가 우리의 있음을 반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타의 관계 속에서 나, , 우리가 함께, 여기에 있다. 그녀의 글 속에는 한나 아렌트라는 고유명 이외에도 그녀와 함께 한 친구나 동료의 이름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렇기에 이 글은 그들/우리의 관계-사이에서 탄생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함께-있음에 대한 사유-행위는 모든 공동체로부터 흘러나오기도 하지만 특히, 아프-꼼에서 지속적으로 붙들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모든 공동체는 함께-있음을 기쁨으로 여기던(여기서 과거형을 사용하는 것은 동료를 만난 기쁨이 점차 더 깊은 외로움이나 일의 강도로 인한 고통으로 변해버린다는 그녀의 말과도 닮아 있는 것이다.) 이들의 연합이라고 할 수 있으나, 양창아의 말처럼 그것은 한편으로는 고통과 더불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더불어 있다는 병치의 관계는 많은 부분 고통이 기쁨을 짓누르는 방식으로 전유되어 드러나기도 한다. 이때, 고통이 수동이나 피동의 위치에 놓여지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기쁨이 고통으로 변해버리는 그 과정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기에 기쁨과 고통은 더불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고통으로 변해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그렇게 긴 시간을 함께 하지는 않았지만, 아프꼼에서도 팀원들과 말을 나누는 것에 오랜 시간을 할애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기쁨으로 되돌리는 과정은 지난하기도 하다. 따라서 이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또는 그것을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다. 그녀의 글은 그 귀찮고 거북하고 지긋지긋한 것과 엮여 그것을 감당하며 겪어낸 장소이기 때문이다.

 

(요즘 자주 느끼는 바이기도 한데) 우리는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하며,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공동체를 만들고 꾸리는 방법은 더더욱 알지 못한다.

 

그녀의 말처럼, 어쩌면 우리는 함께-있음의 기쁨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 고통을 견디거나 마주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말 그대로 그것들은 귀찮고 거북하고 지긋지긋한 것이기에 대면하고 싶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관계 맺는 일의 어려움과 고통에 대해서 더 얘기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또한 그것을 글쓰기를 통해서 풀어내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그 고통을 마주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고 싶다.

 

 

1.1.

 

양창아가 역설하는 관계의 형식이라는 것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관계의 변화이다. 그러나 그 변화 역시 쉽지가 않다. ‘기존이라는 말의 무게, 관성으로 인해 그것은 새로운 것으로의 대체보다 훨씬 더 지난한 과정 속에 놓여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변화/이행은 억압받는 그 이름으로 당당히 제 한 몸 설 수 있는 자리를 갖는 것, 기존의 삶의 형식 또는 인간관계의 형식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는 우리가 여기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사유-행위어느 곳에서 어떤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무수한 자들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나눔의 장소가 많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도처가 그 장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글 속에서 서술되는 것처럼, 한나 아렌트의 공적 영역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생겨난 공간’,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와 당신, 그와 그녀가 만날 때에만 생겨나는 사이-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와 이행 속에서의 사이-공간과 사유-행위에 관한 건넴의 말들을 받고서 어떤 말을 되돌려줄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러한 주고-받음을 통해, 그러한 건넴과 말 속에서 우리들의 여기가 다시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2.

 

이 글 속에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독점또는 그럴듯해 보이고 싶은 욕망을 소거하려고 한다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글의 곳곳에서 자기검열 또는 성찰이 드러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괄호 속에 혹시나 모를 해석의 편중이라는 위험을 피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 두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러한 행위는 글의 논점이 전개되거나 강조되어야 하는 부분을 약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는 연유가 궁금하다.

 

괄호 속의 말들이 구체적인 단서가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논점을 명확하게 하는 데에는 불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말들은 글쓰기/글읽기에 집중하는 것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는 지독하리만큼 꼼꼼한 어떤 힘이 느껴진다. 그것은 괄호 쳐진 말들 또는 글쓰기가 발생시킨 힘들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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